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가해 - 말씀에 귀 기울이는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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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가해 - 말씀에 귀 기울이는 이
우리나라 가훈 가운데 가장 많이 채택된 것이 “가정이 화목하면 모든 일이 이루어진다”라는 의미인 “家和萬事成”이라고 한다. 이는 많은 이들이 가정의 화목을 얼마나 간절히 바라고 있는지를 잘 보여 준다. 그러나 현실을 돌아보면 불화를 겪는 가정, 해체된 가정, 소년·소녀 가장과 독거노인의 증가, 경제적·사회적으로 사람다운 삶을 유지하기 어려운 가정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오늘 성가정 축일에 과연 성가정이란 무엇이며, 우리 가정은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지 묵상하자.
성탄에 드러난 무엇보다 놀라운 신비는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시어 이 세상에 오실 때, 한 가정 안에서 태어나 자라나셨다는 사실이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성을 겉옷처럼 잠시 걸치신 것이 아니라, 사람이 먹고 자고 일하며 살아가는 가장 보편적인 삶의 자리인 가정을 통해 우리 가운데 오셨다. 그로써 가정은 단순한 사회 제도나 생존의 수단을 넘어, 구원이 이루어지는 거룩한 공간이 되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사신 성가정은 어떠했는가? 아무 문제 없이 평온하기만 한 이상적인 가정이었을까? 복음이 전하는 현실은 우리의 기대와 다르다. 마리아와 요셉은 아기 예수를 살리기 위해 한밤중에 도망쳐야 했고, 이집트에서는 설움과 고난을 겪는 외국인 노동자로 살아야 했다.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은 목수 집안에서, 요셉은 생물학적으로 자신의 자녀도 아닌 예수를 책임져야 했고, 그 과정에서 말할 수 없는 불안과 부담을 겪었을 것이다. 인간적인 기준으로 보자면, 이 가정은 결코 안정적이거나 이상적인 가정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교회는 이 가정을 ‘성가정’이라 부른다. 그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오늘 우리가 들은 말씀은 공통적으로 순종을 강조한다. 첫 독서는 부모에게 효도하며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라”는 집회서의 가르침을 전하고, 둘째 독서는 남편과 아내, 자녀들이 서로 용서하고 순종하라는 콜로새서의 권고를 들려준다. 복음은 천사의 경고에 순종하여 행동하는 요셉의 이야기를 전한다. 이 모든 말씀의 중심에는 ‘순종’이라는 주제가 놓여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를 이렇게 정리하였다. “성가정은 불완전함 속에서도 하느님의 뜻에 귀 기울이는 법을 가르쳐 준다.”
‘순종’ 혹은 ‘순명’이라는 말은 라틴어 obedientia에서 왔다. 이 단어는 ‘누구 앞에서’를 뜻하는 ob와 ‘듣다’를 의미하는 audire가 결합된 말이다. 순종이란 단순히 명령을 따르는 맹종이나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는 이해가 아니다. 서로를 존중하며 마주 서서 듣고, 신뢰하며,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책임 있게 응답하는 태도다. 하느님의 말씀 앞에서 귀를 여는 자세이며, 동시에 가족 구성원 서로가 서로의 말을 존중하며 경청하는 삶의 태도다. 바로 이 순종이 성가정의 기초가 된다.
현실에서 화목한 가정을 이루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가족이란 누가 보지만 않는다면 어딘가로 내다 버리고 싶은 관계다.”라는 말에 공감이 갈 때도 있다. 가족은 서로 사랑하지만, 동시에 가장 깊은 상처를 주고받는 관계이기도 하다. 그 이유는 분명하다. 부부 상담이나 가족 갈등의 현장에서 반복되는 말이 있다. “남편이 제 말을 듣지 않습니다.”, “아내는 내 말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가족 관계가 무너지는 근본 원인은 서로의 말을 진지하게 듣고 신뢰하며 받아들이지 않는 데 있다. 말이 닿지 않을 때 관계는 점점 단절되고, 결국 해체로 나아간다.
한 가지 실화가 이를 잘 보여 준다. 미국에서 월남전에 참전한 아들의 가족에게 어느 날 전화가 걸려 온다. “엄마, 저예요. 저 지금 돌아왔어요.” 어머니는 살아 돌아온 아들의 목소리에 반가워 말을 잇지 못한다. 아들은 한 친구 이야기를 꺼낸다. 몹시 다친 친구가 갈 곳이 없어 함께 살고 싶다고 한다. 어머니는 처음에는 이를 허락한다. "아무렴, 그래라. 당분간 같이 살자꾸나. 지금 어디에 있니?” 하고 물었지만 아들은 어머니의 당분간이란 말에 그 친구와 떨어질 수 없다며 늘 함께 살겠다고 말했다. 아들의 억지에 못 이긴 어머니는 할 수 없이 1년쯤같이 살자고 했다. 그러자 아들은 절망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 나는 그 친구와 영원히 함께 살고 싶어요. 그 친구는 몹시 불쌍한 친구예요. 외눈에, 외팔에, 다리도 하나밖에 없어요.” 어머니는 다급한 마음에 아들의 말을 끝까지 듣지 못한 채 이렇게 말한다. “얘야, 정신 차려라. 그 친구는 결국 네 짐이 될 거야.” 그 순간 아들은 “짐이 된다고요?” 하고 묻고 전화를 끊고 만다. 며칠 뒤, 아들은 어머니 집 근처 호텔에서 투신자살한 채 발견된다. 그 아들이 바로 외눈에, 외팔에, 외다리였던 ‘그 친구’였다. 서로의 말을 끝까지 듣지 못하고, 서로를 받아들이지 못한 결과는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이었다.
성가정은 고통과 시련이 없는 가정이 아니었다. 성가정은 어떤 상황에서도 서로의 말을 들어 주고, 받아들이는 경청과 순종으로 이루어진 가정이었다. 마리아는 천사의 알림을 듣고 받아들여 아들 예수를 잉태하였다(루카 1, 38). 요셉은 꿈에 나타난 천사의 지시를 듣고 받아들였다(마태 2, 13-15). 예수님은 부모에게 순종하며 자라났고(루카 2, 51), 생애의 시작부터 끝까지 아버지 하느님께 순종하셨다.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는 순종이 바로 성가정을 이루는 열쇠였다. 마리아의 순종은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계시는 성탄을 가져왔고, 요셉의 순종은 생명을 지켜 냈다. 이해되지 않아도 신뢰하며 듣고 받아들이는 태도가 생명을 낳고, 가정을 살렸다. 그 가운데 하느님의 구원이 땅에서 이루어졌다.
가화만사성의 길은 여기에 있다. 문제없는 가정을 꿈꾸는 것이 아니라, 고통과 불안 속에서도 서로를 경청하고 순종함으로써 하느님의 현존이 머무는 가정이 되면, 가화만사성이 이루어진다. 오늘 성가정 축일에, 우리 각자의 가정이 그러한 거룩한 가정이 되도록 기도하자. 하느님의 말씀이 들리고, 서로의 말이 존중받으며, 그 안에서 생명이 자라고 구원이 이루어지는 가정이 되도록 간절히 청하자.
[출처] 말씀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