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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이 세상에 정의와 평화를 가져오도록 노력한다.
(말씀의 길 회헌 47조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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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30주일 다해 -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작성자 : 말씀의성모영보수녀회   작성일: 25-10-27 08:32   조회: 136회

본문

연중 제30주일 다해 -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우리가 믿는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분명히 보여준다. 대부분의 종교는 신(神)을 힘이 세고 두려운 존재로 여긴다. 그래서 신이 내린 계명을 잘 지키고 제물을 정성껏 바치면 복을 받고, 그렇지 않으면 벌을 받는다고 가르친다. “태초에 두려움이 있었고, 그 두려움이 사람들로 하여금 신을 생각하게 했다.”(Lucretius)는 말은 이런 종교적 현상을 잘 반영한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들려주시는 하느님은 그런 신과 전혀 다르다. 복음에는 바리사이와 세리, 두 사람이 성전에 올라가 기도하는 장면이 나온다. 바리사이는 경건하고 열심히 사는 사람으로, 신앙적으로 모범적인 부류였다. 반면 세리는 식민지 시대에 동족의 세금을 착취해 로마에 바치던 사람으로, 재산은 많았지만 사람들에게 멸시받는 존재였다. 두 사람의 기도는 매우 대조적이다. 바리사이는 자신이 거룩하다고 생각하며 자랑스러운 마음으로 기도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가슴을 치며 자비를 구한다. 예수님은 이 장면을 마무리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신다.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세상의 통념으로 보면, 하느님은 죄 많은 세리보다 모범적인 바리사이를 축복하실 것 같다. 그러나 예수님이 전하신 하느님은 오히려 세리를 의롭게 여기셨다. 이 역설적인 말씀은 우리에게 큰 충격을 준다. 왜 그럴까?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근본 이유는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여 하느님과 하나가 되기 위함이다. 그 하느님은 본래부터 자비로우신 분이다. 첫 독서에서 이렇게 전한다. “그분께서는 가난한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부당한 대우를 받은 사람의 기도를 들어 주시리라. 그분께서는 고아의 간청을 무시하지 않으시고, 과부가 쏟아 놓는 하소연을 들어 주신다.”


자비로우신 하느님은 "가난한 사람, 부당한 대우를 받은 사람, 과부와 고아" 등 자비를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다가가신다. 자랑할 것밖에 없는 바리사이처럼, 자신의 선행을 내세우며 죄인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하느님의 자비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 그런 교만은 오히려 하느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하느님은 착하고 모범적인 사람만 상주는 분이 아니다. 못난 자식을 더 걱정하는 부모처럼, 의인보다 죄인을 더 불쌍히 여기시는 분이다. 하느님은 냉혹한 폭군이 아니라, 자비로운 ‘아빠, 아버지’이시다. “여러분은 다시 두려움에 빠뜨리는 종살이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자녀로 삼아 주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이 성령의 힘으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는 것입니다.”(로마 8, 15)


​신앙인은 죄 없이 완벽하게 살아서 하느님을 감동시키려는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부족하고 죄가 많아도, 자비로운 하느님 품에 자신을 맡기고 그분의 뜻을 따라 사는 사람이다. 기도도 마찬가지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이렇게 말했다. “기도는 하느님께서 모르시는 것을 우리가 가르쳐 드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알게 되는 길이다. 기도를 통해 하느님 마음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우리 자신을 바꾸는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께 지시하거나 설득하기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아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새로운 존재로 변화되기 위해 기도하는 것이다. 그렇게 기도할 때, 자비로운 하느님을 만나고 그분의 이끄심을 따르게 된다.


​복음 속에서도 그 모습을 볼 수 있다. 바리사이는 실제로 훌륭한 일을 많이 했고 경건히 살았지만, 그의 관심은 하느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었다. 혼잣말로 자랑만 늘어놓으니 하느님과의 만남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기도는 공허한 독백일 뿐이다. 반면 세리는 오직 하느님께 시선을 둔다. 자신의 죄스러움을 깊이 깨닫고 감히 고개도 들지 못하며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하고 가슴을 친다. 이 정직하고 단순한 고백을 통해 세리는 하느님을 만나고 자비를 받는다. 예수님은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고 선언하신다. 이 복음의 메시지를 잘 보여주는 이야기가 있다.


​어떤 본당에 매일 정오가 되면 성당에 들어왔다가 2~3분 만에 나가는 할아버지가 있었다. 신부가 궁금해서 물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할아버지는 “기도하러 왔지요.” 하고 대답했다. 신부가 물었다. “그 잠깐 사이에 무슨 기도를 하신다는 겁니까?” “신부님, 저는 배운 것도 모자라고 신심도 깊지 않아 오래 기도할 줄 모릅니다. 그래서 매일 열두 시가 되면 이렇게 와서 ‘예수님, 나요. 나, 죤이에요.’ 하고 말합니다. 그러고는 그냥 갑니다. 짧은 기도지만 들어주실 것 같아요.”


얼마 후, 그 할아버지가 병원에 입원했는데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늘 우울하던 병실 분위기가 환해지고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간호사가 물었다. “할아버지, 병실이 이렇게 밝아진 게 할아버지 덕분이라던데요?” “맞아요. 그런데 그건 내 방문객 덕분이에요. 날마다 나를 기쁘게 해주거든요.” 당황한 간호사가 다시 물었다. “방문객이요? 가족도 없으시잖아요?” “날마다 열두 시면 그분이 와요. 내 침대 저쪽에 서서 빙긋 웃으시며 ‘죤, 나야. 예수야.’ 하신단 말이오.”


​하느님 앞에서 나는 어떤 모습일까? 겉으로만 번듯하게 혼잣말하는 바리사이인가, 아니면 솔직하고 겸손하게 자비를 구하는 세리인가? 기도할 때 달변일 필요도, 겉을 꾸밀 필요도 없다. 죤 할아버지처럼 그저 진심으로 “하느님, 접니다.” 하고 주님을 마주하면 된다. 주님 앞에서 솔직하고 겸손하게 자비를 청하면,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는 주님은 반드시 자비를 베푸신다. 


그렇게 자신을 낮추면 주님이 높여주신다. 복음의 마지막에서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출처] 말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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