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회원가입  |   로그인  |   오시는 길
우리는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이 세상에 정의와 평화를 가져오도록 노력한다.
(말씀의 길 회헌 47조 참조)
말씀의 숲
영성의 향기 말씀의 향기 수도원 풍경 세상.교회의 풍경 기도자리
말씀의 향기

연중 제15주일 가해 –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작성자 : 말씀의성모영보수녀회   작성일: 25-07-15 09:13   조회: 88회

본문

연중 제15주일 가해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들려주신다. 그 배경이 인상적인데, 예수님을 시험하려는 율법학자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느냐고 먼저 질문한다. 예수님은 율법에 나온 대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실천하라고 이르신다. 이 말씀에, 율법교사가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라고 따진다. 이는 '예수님 당신 말은 나도 아는데, 세상에는 별놈 다 있다. 종교가 다른 이방인, 접촉하여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죄인, 창녀 세리, 사기꾼 등등. 그 가운데 내가 누구를 사랑해야 하느냐? 그들 모두를 사랑해야 하나?'라는 의미가 담김 당돌하고 도전적인 질문이다.

 

그러자 예수님은 강도 만난 사람을 대하는 사제와 레위인 그리고 사마리아 사람 이야기를 들려주며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하고 되물으신다. 율법교사가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라고 이르신다. 반전이다. "내 이웃이 누구냐"고 물었는데, 예수님은 누구라고 답하시지 않고, "네가 그렇게 하라", 이웃을 찾지 말고 네가 이웃이 되라고, 발상을 전환하라고 초대하신다.

 

주목할 점은 강도 만난 사람이 누구인지 전혀 언급이 없다는 점이다. 이는 죄인인지 의인인지, 이방인인지 열심한 동포인지 구분하지 말고 도움이 필요한 누구든 자비를 베풀라는 말씀이다. 또한 사회적 지위가 높던 사제나 레위는 강도 맞은 사람을 외면하는데, 천대받던 사마리아인이 자비를 베푼다. 사회적 지위나 명성이 아니라 자비를 베푸는 마음이 영원한 생명으로 가는 길이다.

 

교부들은 이 비유를 인간 역사로 해석하였다. 강도를 만나 가진 것을 뺏기고 초주검이 되어 길가에 쓰러진 존재는 소외된 인간의 상징으로 보았다. 역사상 힘없는 사람들은 강도질을 당하듯 짓밟히고 이용당하며 살아왔다. 힘 있는 사람들은 자신만 살겠다고 다른 사람을 이용하고 빼앗고 억압했다. 결국 인간은 강도질 당한 사람이자 동시에 강도이기도 하다. 사건이 벌어진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가는 길은 인간의 역사를 상징하고, 이 길에서 초주검이 된 사람은 인류를 상징한다는 해석이다.

 

성경의 비유는 단순한 옛날이야기가 아니고 지금의 현실을 반영한다. 인류의 역사뿐 아니라 개인의 삶에서도 강도를 만난 듯 위태로운 지경에서 도움을 청했다가 외면당하기도 하고, 강도처럼 내가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며 이웃을 해치기도 하고, 혹은 레위나 사제처럼 어려운 사람을 외면하며 살아간다. 진리를 알면서도 거짓과 타협해야 하고, 재물이 모든 것이 아니라면서도 돈의 위력에 매여 살고, 도와주어야 할 사람을 보면서도 가족 걱정에 외면하고, 전화 한 통이면 위로가 되는 친구나 가족에게 바쁘다고 미루는 때가 한두 번이던가? 그렇게 살아가는 우리가 강도이자 강도 만난 사람, 레위이자 사제이기도 하다. 이웃이 없는 상황에서는 강도든, 강도 맞은 사람이든, 지나쳐가는 이든 누구도 행복할 수 없다.

 

이 비극적 소외 상황은 사마리아 사람에 의해 극복된다. 누가 사마리아 사람일까? 복음에서는 어려울 때 도움을 주는 사람이었다. 교부들은 사마리아 사람은 바로 예수님이라고 해석하였다. 사마리아 사람처럼 낯설고 멀리 있는 존재로 여겨지던 하느님의 아들이 세상으로, 내려와 위험에 빠진 이들을 위해 목숨까지 내어놓으셨다. 1독서에서 "하느님의 말씀은 멀리 하늘 위에, 바다 건너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입과 마음에 있다"고 일러준다. 그 하느님의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강도 맞은 인류에게 사마리아 사람처럼 다가오셨다. 그러기에 바오로 사도는 제2독서에서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이라고 전한다. 하느님의 모든 권능이 그분 안에 있기에 예수님을 보는 사람은 곧 하느님을 보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따라서 사마리아 사람처럼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우리는 예수님을 볼 수 있고, 그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게 된다.

 

예수님의 뒤를 따라 수단 톤즈에서 사마리아인처럼 살았던 이태석 신부는 "어떻게 천국에 이르나?"는 질문을 받고 이렇게 답하였다.

 

"세 명의 등산가가 눈 덮인 산에서 내려오다 길을 잃고 헤맸다. 모두 지친 상황에서 한 명이 다리를 다쳐 더 이상 걸을 수 없게 됐다. 한 명은 다친 사람을 두고 혼자 산을 내려갔다. 한 명은 다친 사람을 엎고 간신히 내려갔다. 가다 보니 먼저 내려간 사람이 얼어 죽어 있었다. 하지만 부상자를 업고 간 사람은 땀을 흘리느라 체온을 유지해 살 수 있었다. 하늘나라는 죽어 가는 이웃을 외면한 채 혼자 들어갈 수는 없다. 이웃을 위해 나를 던지는 사람은 이웃을 살릴 뿐 아니라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살게 된다." (이태석, ‘당신의 이름은 사랑’)

 

누가 이웃이냐는 질문에 예수님은 자비를 베푸는 사람임을 일러주시며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고 이르셨다. "어떻게 천국에 이르나?"는 질문에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던 이태석 신부의 답변은 "이웃을 위해 나를 던지는 사람은 이웃을 살릴 뿐 아니라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살게 된다."는 진리였다.

 

왜 자비를 베풀어야 할까? 비유 말씀에서 놓치면 안 될 중요한 점이다. 오늘 말씀의 발단은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이었다. 자비를 베풀고, 이웃을 사랑할 이유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함이다. 강도 맞아 넘어진 사람을 일으키고, 격려 한 마디로 사랑을 실천하는 일은 단순히 착하고 훌륭한 일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이다.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이다. 그런데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그러므로 사람이 사랑을 실천하면 하느님을 닮게 된다.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이르신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라는 말씀은 인간 본래의 모습인 하느님의 모습을 되찾고, 하느님의 생명인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길이다. 이처럼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실천은 단순한 윤리적 권고가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받는 조건이다.

 

[출처] 말씀에

해뜨는 마을 l 영보자애원 l 영보 정신요양원 l 천안노인종합복지관
교황청 l 바티칸 뉴스 lCBCK 한국천주교주교회의
한국 천주교 여자수도회 l 한국 천주교 주소록 l 수원교구
우. 13827 경기 과천시 문원청계길 56 말씀의성모영보수녀회
56 MunwonCheonggyegill Gwachon-si Gyeonggi-do TEL : 02-502-3166   FAX : 02-502-8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