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찬 성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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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찬 성목요일
탈출 12,1-8.11-14; 1코린 11,23-26; 요한 13,1-15
"너희는 이를 행하라.“
예수께서는 돌아가시기 전날 밤인 성목요일, 죽음을 앞두고 당신의 온 생애와 가르침을 담은 성체성사를 제정하시고 우리에게 남겨 주신다. 이 신비의 핵심이 우리가 들은 말씀 가운데 'Pasqua 건너뜀'이라는 단어에 담겨있다. 첫 독서는 이집트에서 종살이를 하던 이스라엘 백성이 해방되는 사건을 전하는데,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흠 없는 양이나 염소"를 잡아 그 피를 문설주에 발라놓으라고 명하신다. 그러면 죽음의 사신이 피가 묻은 집을 "거르고" 지나감으로써 생명이 보장되었다. 이 건너뜀의 "과월절 Pasqua"은 이어서 홍해 바다를 건너뛰고, 약속된 땅을 향해 죽음의 사막을 건너뛰는 사건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그 건너뜀은 죄나 죽음 앞에서 멈출 수밖에 없었다. 인간의 절대적 한계인 죄와 죽음을 건너뛰는 진정한 파스카는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을까?
둘째 독서는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 장면이다. 주님께서는 빵을 들고 감사를 드린 다음 "이는 너희를 위한 내 몸"이라고 선언하신다. 또 잔을 들고 "이 잔은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어린 양의 피로 맺은 옛 계약은 하느님의 아들의 피를 통해 새 계약으로 대치된다. 온전히 순종하지 못하기에 지켜질 수 없었던 옛 계약(탈출 24, 7-8참조)은 예수께서 온전히 순종하심으로써 새 계약(예레 31,33참조)으로 완성하신다. 더 나아가 자신을 희생양으로 내어주는 사랑은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라는 명령의 말씀으로 우리 몫이 된다. 성체성사가 받아먹음으로 끝나는 형식적인 예식이 아니고, 우리 삶에서 실행할 신비라는 말씀이다. 성체성사의 실행이 죄와 죽음까지 건너뛰게 하는 파스카임이 선포되었다.
복음은 최후 만찬을 전한다. 네 복음서 가운데 여타의 세 복음서가 성체성사 제정 과정을 소상히 전하는데 비해 요한복음은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는 장면만 전한다. 발을 씻겨주시는 모습이 성체성사 제정에 관한 세부사항을 대치시킬 정도로 성찬의 근본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리라. 발을 씻겨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하느님이 누구신지 드러나고, 인간의 결정적 한계인 죽음을 건너는 파스카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밝혀진다.
서두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로 건너가실 때"가 오자,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라고 전한다. 끝까지 사랑하심이 파스카의 출발점이다. 사랑 때문에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셨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고, 성체로 당신을 내어주신다. 발을 씻기 위해서는 몸을 굽혀 내려가서 상대방을 우러러보아야 한다. 하늘에서 내려와 사람이 되신 분께서는 오늘 우리 발아래로 내려와 사람을 우러러보신다. 하느님은 인간의 봉사를 받으시는 높은 분이 아니라, 인간의 발을 닦아주시는 낮은 분으로 드러나신다. 참으로 하느님이 누구이신지 계시되는 장면이다. 하느님께서는 사랑이셨다. 사랑만이 세상의 어둠과 죄악과 죽음을 건너뛰게 한다. 사랑이 하느님의 아들 예수께서 하신 모든 말씀의 근원이자 파스카의 본질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맨발에 기껏해야 샌들 정도 신고 다녔다. 그 발은 대개 흙먼지와 땀과 냄새로 뒤범벅이었다. 발은 세상의 험한 길을 걷느라고 늘 상처받는 나약한 면을 상징한다. 예수께서 발을 씻어주심은 세상살이에 지치고, 땀과 먼지로 냄새나고, 상처받아 아픈 우리 삶을 씻어주시는 상징이다. 온통 더럽혀져 아프고 부끄러운 나를 받아주시고 씻으심으로 이제 나는 소중한 존재로 바뀐다. 여기서 인간이 누구인지 밝혀진다. 그가 누구든, 성하든 병들었든, 죄인이든 의인이든 인간은 모두 하느님께 사랑받는 존재라는 기쁜 소식이 선포된다.
베드로가 "주님께서 제 발을 씻으시렵니까?"하고 저항하자, 예수께서는 "내가 하는 일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지만 나중에는 깨닫게 될 것이다"라고 이르신다. 당신께서 죽으신 다음에야 발을 씻어주신 뜻을 깨닫게 되리라는 말씀은 십자가의 죽음을 암시하시는 말씀이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에서 인간의 모든 상처와 죄악을 씻어주시고, 부활하심에서 죽음을 넘어서신다.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이루시는 진정한 건너뜀의 파스카가 발을 씻기시는 모습에 담겨있다. "손과 머리도 씻어달라"는 베드로에게 "목욕을 한 이는 온몸이 깨끗하니 발만 씻으면 된다"라고 말씀하심으로써 당신의 죽음을 통해 우리의 온 존재가 씻기고 치유됨을 일러주신다.
"내가 너희에게 한 일을 깨닫겠느냐?" 예수께서는 발 씻김의 뜻을 물으신다. 그리고 결론을 선언하신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 당시 유대의 자유민 남자들은 누구도 다른 사람의 발을 씻기지 않았다. 이런 천한 역할은 이방 출신 노예들의 몫으로 부정한 행동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발을 씻기려 했을 때 베드로를 손사래를 친 것은 당연하다. 스승이 이방인 노예처럼 처신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따르던 초기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발을 닦아주신 스승을 따랐다. 그 결과 “유다인도 그리스인도 없고,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도 여자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입니다”(갈라 3,28)라는 말씀대로 차별 없는 삶을 추구하였다.
더럽고 부족하기 그지없는 서로를 소중한 존재로 받아들이고 씻어주는 사랑이 성체 성사에 담긴 의미이고 어둠에서 빛으로 건너뛰는 길이요,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가는 파스카다. 서로가 서로에게 발과 상처와 아픔을 내어 주고 받아들여서 자신과 남이 하나가 되고, 주님과 내가 하나가 되는 사랑이 성체 성사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라는 말씀이다. 이렇듯 최후 만찬 장에서의 예수님은 당신의 온 생애를 압축하여 성체의 신비를 전한다.
오늘, 내 발을 씻어 주시는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보자. 나를 받아주시고, 용서하시고, 정화시키시어, 성화하시는 주님을 보자. 그 사랑이 나에게 와서 나를 섬기신다. 그 사랑을 받을 때 다른 이의 발을 닦을 길이 열리고 그렇게 삶의 어둠을 건너뛰는 사랑으로 성체성사는 재현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