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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이 세상에 정의와 평화를 가져오도록 노력한다.
(말씀의 길 회헌 47조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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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수난성지주일

작성자 : 말씀의성모영보수녀회   작성일: 20-03-16 18:11   조회: 6,95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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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수난 성지주일

이사야 50,4-7; 필리피 2,6-11; 마태  26,14-27.66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


오늘의 전례는 기쁨과 슬픔이 대조를 이루고 있다. 예루살렘 입성 때는 겉옷을 길에 깔고 나뭇가지를 흔들면서 "호산나!"라고 외치며 예수님을 열렬히 환영했던 군중이, 재판이 시작되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돌변한다. 인간들은 주님을 높은 데서 오시는 영광스러운 왕으로 환영하지만, 예수께서는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심으로 초라한 죄인이 되신다. 이 모순에 담긴 신비는 우리가 참여함으로써 우리 안에 드러난다.

수난 복음에는 다양한 인물상이 등장하는데 바로 우리 이야기이기도 하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예수님을 이용하는 유다는 이기심을 채우는 방편으로 신앙을 이용하는 우리 모습이다. 예수께 대한 개인적 친분도 있고, 믿음도 지녔지만 제자임을 거부하는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지만 일상에서 제자 답지 못한 모습이다. 남의 눈이 두려워 무죄한 예수님을 죄인으로 내어주는 빌라도는 타인을 의식하여 슬그머니 진실을 외면하는 비겁한 모습이다. 사제들, 바리사이, 율법학자들은 물질적, 정신적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예수님을 고발한다. 선량하게 살다가도 조금이라도 자신에게 피해가 생기면 결사적으로 저항하는 우리 모습이다. 예수님을 구세주라고 따르다가, 자기 뜻과 다르다고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친 군중들은 신앙을 통해 새로운 삶을 기대하다가 기대가 채워지지 않으면 익명으로 부화뇌동하는 우리의 모습이다. 그리고, 처형되시는 예수님을 멀리서 보면서 가슴이 찢어지는 피눈물을 흘리는 성모님과 부녀자들: 삶의 질곡에서 어디에도 하소연할 곳 없이 한 맺혀 좌절과 절망 속에 울부짖는 이들로 보인다.

예수께서는 이렇듯 보잘것없고 나약한 인간인 우리를 위해 돌아가셨다는 점이 무엇보다 무겁게 다가온다. 말씀의 결정적 장면을 보자. 예수께서 십자가상에서 "오후 세 시쯤에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부르짖으셨다.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 이는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라는 뜻이다." 얼마나 절박하고 구체적이고 현실적이었으면 복음사가는 그리스어로 복음을 기록하면서 이 구절을 당시 서민들이 쓰던 방언인 아람어로 원문 그대로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 라고 옮겨 놓았을까. 예수께서 외치신 절규, 하느님을 원망하는 듯한 이 절규에 복음의 핵심이 담겨 있다.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 하는 물음을 가지고 아버지께 나가시는 예수님을 다시 보자. 우리가 신앙을 통해 그 답을 찾고자 하는 삶의 문제들; 고통은 왜? 늙음은 왜? 죽음은 왜? 불의는 왜? 이 모든 절망에 찬 실존의 물음에 주님께서는 아무런 답을 주시지 않으신다. 그냥 이 아픔 모두를 짊어지시고, 이 절망을 두 팔 가득 품어 안아 아버지께 드리신다.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의 절망과 고통을 아버지께 외치신다.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 그것이 예수께서 마지막까지 보여주신 사랑이었다. 절망과 고통을 포함하여 우리가 겪는 모든 삶을 아버지께 이끄시는 것, 그것이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궁극적 목적이었다.

여기에 예수님의 삶과 죽으심의 신비가 담겨있다. 예수님은 먼저 하느님에 의해 사람으로 태어나 인간 세계에 넘겨졌다. 그리고 그의 죽음이 인간에게 구원을 주도록 하느님에 의해 인간 손에 넘겨졌다. 구체적으로 유다의 손에 넘겨지고, 빌라도 손에, 헤로데 손에, 의회 손에, 사형 집행인 손에 넘겨졌다. 수난 받는 야훼의 종(1 독서, 응송)으로 동네북처럼 이리저리 채이는 모습이다. 그리고 십자가상에서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라고 절규하신다.

주님의 모습은 권능의 모습이 아닌 나약함의 극치이다. 늘 혼자 기도하시던 분이 죽음 앞에는 공포와 번민에 싸여 제자들을 데리고 기도하신다. 누구 앞에서도 당당하게 말씀하시던 분께서 빌라도의 심문 앞에 이상하게도 침묵을 지키신다. 위선자들을 호되게 책망하시던 분께서 거짓 고발에 대해 아무런 답변도 하지 않으신다. 채찍질을 받고, 가시관을 쓰며, 남의 도움을 받아 십자가를 지신다. 얼마나 약해 보였으면 사람들이 "성전을 허물고 사흘 안에 다시 짓겠다는 자야, 너 자신이나 구해 보아라. 네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아라"라고 조롱까지 한다.

하느님의 권능은 극한에 이르는 "나약성"의 상태에서 드러난다. 당당한 승리자가 아닌 초라한 죄수, 부유하게 소유한 분이 아닌 가난하게 내어 주시는 분이 하느님이시다. 하느님께서는 영원토록 타인에게 자신을 내어주는, 죽는 행위로만 존재하신다. "십자가 위에서 보여주신 하느님의 모습은 전능하신 분이 아니라, 전적인 무능의 이미지다. 그 전적인 무능이야말로 하느님의 진정한 본질이고, 그리스도의 죽음이야말로 하느님의 영광을 완전히 계시하신다."(C. M. 마르티니)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 일그러지고 피를 흘리며 침과 땀과 피로 범벅이 된 인간,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앙 같은 그 인간이 영원한 존재의 비밀을 벗겨낸다. 그리고 부활을 통해서 죽음을 넘어서는 생명의 문이 우리에게 열리게 된다. 그리하여 사랑은 죽음보다 강한 것이라는 그 비밀은 오직 신앙에 의해서만 문이 열리는 부활의 신비에서 온전히 드러난다. 이것이 파스카의 신비다. 그러기에 인간의 삶은 그분 안에서가 아니고서는, 그분에 의해서가 아니고서는 아무 의미가 없다(F. 바리용). 오늘 시작되는 성주간, 그 수난과 죽으심을 우리 가슴속에 깊게 새길수록 예수님의 부활도 생생하게 우리 안에 재현될 것이다.


"당신이 키레네 사람 시몬이라면, 십자가를 짊어지고 그리스도를 따르십시오.

당신이 그 강도처럼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있다면, 그 착한 강도처럼 하느님께 의탁하십시오.

그리스도께서 당신과 당신의 죄 때문에 죄인으로 취급당하셨다면, 당신은 그분을 위해서 의인이 되십시오.

당신이 자신의 과오 때문에 십자가에 달려 있으면, 당신 때문에 십자가에 매달리신 분을 경배하십시오.

당신의 죽음으로 구원을 사십시오. 예수님과 함께 천국에 들어가서, 죄로 인해 잃었던 그 천상 상급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알아보십시오

그곳의 아름다움을 관조하고, 비방하는 자는 그가 주는 모독과 함께 밖에서 죽도록 내버려 두십시오.

당신이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이라면, 사형 집행인에게 유해를 달라고 청하여 온 세상을 위한 그 속죄물이 당신의 속죄물이 되게 하십시오.

당신이 밤중에 하느님을 경배했던 니고데모라면 향료를 가지고 와 주님의 장례를 준비하십시오.

당신이 마리아 또는 다른 마리아, 또는 살로메, 요안나라면 이른 아침부터 눈물을 흘리며 돌이 굴려 나 있는 것을 누구보다 먼저 보고 천사도 보며 예수님까지 볼 수 있도록 하십시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파스카에 참되게 참여하는 것입니다." - 나지안즈의 성 그레고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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