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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길 회헌 47조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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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승천 대축일

작성자 : 말씀의성모영보수녀회   작성일: 20-05-24 10:31   조회: 6,435회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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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승천 대축일 가해
마태28,16-20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이 빛나는 하늘나라에

 


오늘은 예수님께서 하늘에 오르심을 기념하는 주님 승천 대축일이다. 예수님께서 올라가신 하늘은 어떤 곳일까? 예수께서 하늘에 오르셨다는 것은 물론 지구를 떠나 우주 속의 어느 별에 오르셨다는 말은 아니다. 승천은 물리적 개념이 아닌 신앙의 언어로써, 예수께서 오르신 하늘은 우주의 공간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계신 자리를 뜻하기 때문이다. "하늘"의 신앙적 의미는 주님 승천이 우리 신앙에 어떤 뜻을 지니는지 일러준다.

성서에서 하늘은 인간이 접근할 수 없는 높이를 가졌기에 신적인 초월, 무한함, 높음의 상징적 장소다. 또한 신비로운 우주의 질서를 담고 있으며 완벽한 조화로움의 상징이기도 하다. 천문학적 의미가 아니라 종교적인 의미를 지닌 "하늘"은 하느님의 처소를 상징하였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처소인 하늘에 가만히 머무르시지 않고 땅으로 내려오시어 사람이 되신 분이 예수님이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고향인 하늘에 관해 살아생전에 자주 말씀하셨다.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라고 선포하시며,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는 말씀으로 하늘은 당신의 아버지가 계신 곳임을 일러주시고, 재물을 하늘에 쌓으라고 이르셨다. 또한 하늘나라에 관한 비밀을 간직하신 분으로 제자들에게 그 신비를 자주 일러주셨다. 그렇게 하늘로부터 오신 분이 다신 하늘로 오르신 사건이 승천이다.

더욱이 하늘에서 오셨던 예수님께서 하늘로 되돌아가셨기에, 이제 그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우리도 하늘에 오르는 길이 열린다. 예수님을 믿는 이들은 이 하늘을 그리워하는 이들이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거기서 구원자로 오실 것을 고대합니다. 그분은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키실 것이니, 곧 만물을 당신께 굴복시킬 수 있는 권능으로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필립 3, 20-21). 주님의 승천 축일은 곧 우리가 땅을 디디고 살지만 땅에 묶이지 말고, 주님께서 오르신 하늘로 마음을 드높이며 "새 하늘과 새 땅"(묵시 21, 2)에 대한 희망을 새롭게 하라고 주님께서 우리를 초대하시는 날이다.

그러나 자신 앞에 하늘이 열린 줄 모르는 이들은 내내 땅에 묶여 허우적대다가 땅에 묻힐 수 있다. 인디언 전설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어떤 사람이 독수리 알을 발견하여 자기 집 뒤뜰 닭장 안에 갖다 놓았더니, 독수리 새끼가 다른 한 배 병아리와 함께 알을 까고 함께 자랐다. 일생 내내 이 독수리는 닭이 하는 짓을 하며 스스로 닭이라고만 여겼다. 땅바닥을 긁어 벌레를 잡아먹고, 꼬꼬댁 꼬끼오 소리를 내며, 날개를 푸드덕거리며 공중으로 조금만 날곤 했다. 세월이 가고, 독수리는 매우 늙었다. 어느 날 무심코 쳐다보니, 멀리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큼직한 새가 떠돌고 있었다: 튼튼한 금빛 날개를 좀처럼 퍼덕이는 일조차 없이 세찬 바람결 속에서 우아하고도 위풍당당하게. 늙은 독수리는 경외심에 차서 쳐다보며 이웃 닭에게 물었다. "저분이 누구지?" "저분은 새들의 왕이신 독수리님이야." 이웃 닭이 말했다."하지만 딴 생각일랑 말라고. 너나 나나 그분과는 달라." 그 독수리는 끝까지 닭으로 살았다고 한다.

우리는 누구인가? 처음엔 땅에 묶인 존재인 닭이 아니라 하늘을 날 수 있는 독수리, 즉 하느님의 자녀였다. 그러나 원죄 이후 닭으로 전락해버렸다. 이런 세상 속에 하느님께서 사람으로 오셔서, 닭장 같은 인간 조건을 극복하고 독수리가 하늘을 날듯,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로서 살아갈 길을 열어 주신 사건이 주님의 승천이다. 하늘을 보며 자신의 귀함을 인정하지 못하고 땅에 묶여 꼬꼬댁 거리며 닭장에서 모이나 쪼고 있다면, 우리 삶도 닭이 되고 말 것이다. 닭이 아닌 독수리, 땅의 존재로 머무르지 않는 하느님 자녀로 사는 모습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일까?

"난 목사이면서 개신교인들 참 싫어하지요. 배타적이고, 저 혼자 잘났고, 제 교회, 제 목사, 제 교인들끼리만 어울리는 좀생이라 그렇습니다. 제가 기독교에 반한 건 신이 인간 세계를 떠나 제 혼자 고고하게 사는 게 아니라 사람이 그리워 하늘에서 인간세계로 내려왔다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신이 내 밖에 존재하는 게 아니라 내 안에 계시다는 사실, 하늘 아버지를 보여달라는 제자들의 성화에 예수께서 단 한 마디,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요한 14: 9)라고 하셨지요. 그대의 존재 그 자체만으로 세상이 밝아지는 그런 사람, 제 자신에 매여 속박 당하지 말고 더 넓은 품이 되어 걸어가는 사람. 나보다는 너에 대한 배려를 앞세우고 가는 사람. 함께 가려 하고 나누는 것 할 줄 아는 사람. 늘 사람의 길을 가려고 애쓰며 제 잘못 고쳐가며 고개 숙일 줄 아는 사람. 염치가 있는 사람. 신이 그리운 사람."(안병길 목사) 이런 사람들이 땅에 묶이지 않고 자신의 존엄성을 하늘에 이르게 하는 사람들 아닐까?

교회는 그런 사람들이 모인 곳이기에 둘째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역설하신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 능력을 펼치시어, 그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시고 하늘에 올리시어 당신 오른쪽에 앉히셨습니다. 또한 만물 위에 계신 그분을 교회에 머리로 주셨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모든 면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그리스도로 충만해 있습니다."(에페 1, 20-23)

주님께서 오늘 승천하신 사건은 머리이신 주님께 우리가 지체로써 붙어있을 때, 머리의 승천에 따라 지체인 우리 역시 하늘로 오르는 길이 열린 사건이다. 그러기에 본기도에서 “성자 그리스도의 승천으로 인간의 품위를 들어 높이셨으니,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이 빛나는 하늘나라에, 그분의 지체인 저희의 희망을 두게 하소서.”라고 기도하였다. 참혹한 일들이 이어지는 험한 세상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듯 보이는 보잘것없는 '나'라는 존재가 하늘로 오르는 가능성이 주어지고, 나의 존엄성이 하늘에 이르도록 귀하게 된 참으로 기쁘고 감사한 사건 앞에 마음 깊이 하느님을 찬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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