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제2주일 곧, 하느님의 자비 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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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제2주일 곧, 하느님의 자비 주일
요한 20,19-31
평화가 너희와 함께!
오늘 복음은 부활 후 예수님의 제자들이 두려움에 문을 모두 잠그고 숨어 있었다고 전한다. 스승의 부활을 기뻐하지 않고 왜 두려웠을까?
아마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뵈었다는 막달라 마리아의 말에 믿음이 가지도 않고, 예수님의 죽음 현장에서 도망친 자신들의 과거가 부끄럽고,
예수님을 죽였던 유대인들의 해코지도 두려웠을 것이다. 부끄럽고 두려워 방문을 잠그고, 마음의 문도 닫아걸고 숨었을 것이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이 두려움을 어떻게 넘어설까?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라고 복음은 전한다.
방문을 잠그고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주님께서 먼저 다가오시는 모습은 과거의 잘못을 용서하고 위로하시는 상징이다.
그러기에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책망하지 않고 평화를 빌어주신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샬롬)는 단순히 위험이나 갈등이
해소된 상태만을 이르는 말이 아니다. 성경에서 평화는 전 인간적인 안녕 상태를 말한다.
일상생활에 만연한 죄의 세력으로부터 안전하고, 죽음의 두려움으로부터도 안전하며, 궁극적으로는 우리가 하느님의 자비로운 품
안에 받아들여졌을 때 몸과 마음 전체가 느끼는 안전 상태가 부활하신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다.
예수님께서는 거듭 "평화가 너희와 함께!"하고 인사하시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라는 파견의 말씀을 하신다.
스승의 죽음 현장에서 도망친 제자들은 생전에 주님께서 주신 소명을 상실한 상태였다. 그래서 스승의 부활 소식에 믿음이 아닌 두려움을 갖고
숨어 있었다. 그런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주님은 부르심의 소명을 다시 일으켜 세우신다.
이렇듯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먼저 다가오셔서 삶에 지치고 부끄러운 우리를 위로하시고 온전히 받아들이는 평화를 주시며
사명감을 회복시켜 주신다. 그것이 우리가 부활을 기뻐할 이유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오늘 복음에서 토마스는 예수님을 뵈었다는 다를 제자들의 말을 듣고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한다.
토마스는 왜 믿지 못했을까? 근본 원인은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라는 데에 있다.
그가 제자들과 함께 있었다면 주님 부활을 못 믿겠다고 우기지 않았을 것이다. 제자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토마스는 세상 일을 "내 눈으로 보고, 내 손으로 만져서" 지신이 결정하는 유형의 사람이었다. 자신의 힘으로 신앙을 깨우치려고
노력하는 경우를 대표한다. 신앙은 혼자서 찾을 수 없다. 누구도 스스로에게 생명을 줄 수 없듯 스스로에게 신앙을 주지 못한다.
믿음은 다른 이로부터 전달받으며, 받은 신앙을 또 다른 이들에게 전달해야 한다. 스스로의 힘으로 신앙을 찾으려 하면 자기식의
신앙을 갖게 되고, 주님의 부활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된다.
"착하게 살고 마음으로 믿으면 되었지 굳이 성당에 다닐 필요가 있느냐? 지금은 냉담 중이지만 내 신앙은 변함없다,
형편이 나아지면 신앙생활을 하겠다."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혼자서 신앙을 찾으려는 토마스의 모습이다.
아우가 물었다: “형, 같은 죄인인데 왜 예수님께 의탁한 사람만이 다시 삽니까?” “돌멩이를 바다에 던져보아라.
어찌 돌멩이가 뜨겠느냐? 그러나 배에 실린 돌멩이는 가라앉지 않는다.”
진정한 신앙은 제자들과 함께, 즉 교회 안에서 공동체를 통해서 드러난다. 이런 이유에서 부활하신 주님은 성령을 받으라고 하신 후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
"너희", 즉 제자들로 대표되는 교회에 죄 사함의 권한을 주신 것이다.
혼자 힘으로 자기 식대로 믿어보려던 토마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상처를 직접 만져보라고 이르신다.
그러자 토마스는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하고 고백한다. "저의 주님"이란, 남의 말을 듣고 추상적으로 생각하던 막연한 주님도
아니고 자기식으로 투사한 하느님이 아니라, 예수께서 나와 인격적 관계를 맺은 주님, 나를 아시고 내가 참으로 체험했기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주님이라는 신앙고백이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는 고백은 곧 사람이든 재물이든 건강이든 성공이든
다른 무엇도 나의 주인이 아니고 나의 하느님이 아니라는 선언이다.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만 자신의 주님이고 자신의 하느님으로 고백하는 이는 자신에게 죽고 참된 생명으로 부활한 이들이다.
토마스는 쌍둥이였다고 한다. 대개 쌍둥이는 함께 행동한다. 토마스와 쌍둥이인 형제는 누구일까? 교부들은 토마스의 쌍둥이는
바로 주님을 따르려는 모든 신앙인들이라고 해석한다. 혼자 살아보려고 제자단을 떠나기도 하고, 보지 못하면 믿지 못하겠다고
우기기도 하고, 그러나 우리에게 오신 주님을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으로 고백하는 신앙인의 여정이 바로 토마스의 여정이기에
우리가 토마스의 쌍둥이라고 풀이하였다. 토마스가 보고 만졌던 주님의 몸을 미사 때마다 받아 모신다.
나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분을 모시는 그 순간 우리도 진정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하고 고백할 수 있는 부활 신앙을 기도한다.
예수께서는 끝으로 토마스에게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고 말씀하신다.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은 예수님의 상처를
보지 않고도 고통과 부활을 믿듯, 인간의 고통과 상처를 만나면 거기서 보이지 않는 예수님의 상처를 느끼고, 더 나아가 부활을
믿는 사람 아닐까. 주님의 죽음과 부활에 이렇게 결합된 이들은 힘들고 아픈 삶을 절망으로 끝내지 않고 새로운 삶으로
부활하리라는 믿음이 있기에 세상이 줄 수 없는 행복을 누린다는 말씀으로 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