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2주간 월 -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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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제2주간 월 -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
"주님, 저희는 모두 얼굴에 부끄러움만 가득합니다.
저희가 당신께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독서)
나라가 망하고 시련과 고난의 한가운데서 다니엘은 진실한 통회 기도를 드린다.
"얼굴에 부끄러움"은 사물이나 사건 앞에서가 아니라 한 인격 앞에서 느끼는 부끄러움이다.
법규의 위반이 문제가 아니라, 그로 인하여 인격적 관계가 상했기에 부끄럽다.
그렇게 부끄러운데도 죄를 고백하는 까닭은 주님께서 용서해 주신다는 신뢰가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자비를 신뢰함이 참회의 본질이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복음)
용서하기 힘들다며 심판과 단죄의 악순환에 빠진 이들에게 그 이유를 물으면
대개 '내가 용서해도 상대방은 변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하느님의 자비를 보지 않고, 나와 상대방만 보면 용서는 손해 보는 일이기에 실행하기 힘들다.
하느님의 자비를 볼 때, 상대방이 달라지지 않더라도 하느님의 자비를 받아들인 내가 달라져서,
하느님께서 세상을 보시듯 새로운 마음으로 세상을 보게 된다.
자신뿐 아니라 타인에게도 자비를 베풀고, 용서하고, 나눠주는 삶이 열린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
너희가 심판하는 그대로 너희도 심판받고,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받을 것이다"
"용서가 판단과 단죄와 연결될 때는 왜곡되고 변질된다.
내가 누군가를 용서한다고 할 때 실은 상대의 잘못이지만 내가 은혜를 베푼다는 식으로 말한다면,
나는 가련한 죄인을 기꺼이 용서하는 너그러운 의인의 역할을 만끽하는 꼴이다.
그런 식으로라면 부당한 우열이 생겨난다.
용서하는 사람이 용서받는 사람보다 우월하다고 여기지 않을 때만,
용서가 상대에게 치유와 해방의 행위로 받아들여진다.
모든 판단과 평가와 단죄를 포기하는 것이 그래서 반드시 필요하다.
또한 판단은 단지 다른 사람의 행동에만 해당되는 게 아니라,
먼저 나 자신과 내 행동에도 해당된다."(A. 그륀, 주님의 기도)
"너희가 남에게 주는 분량만큼 너희도 받을 것이다."
하느님의 자비가 저울에 달 듯 양이 정해졌다는 뜻이 아니라,
남에게 주는 만큼 우리 마음이 열릴 것이라는 의미로 들린다.
마음이 열려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다.
마음이 열린 그만큼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주시는 자비를 받아들인다.
[출처] 말씀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