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6주일 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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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6주일 가해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로 가는 여정을 일러주시며 밀밭에 가라지가 섞여 있는 상황에 비유하신다. 밀이 잘 크도록 가라지를 뽑아 버리자는 주장에, "수확 때까지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하고 이르신다. 예수님 시대에 사회를 구성했던 주요 세력들은 알곡과 가라지를 구별하는 시도를 하였다고 한다. 열심당원들에게 가라지는 식민지 지배자 로마인들, 이들을 당장 뽑아버리려는 조급함으로 폭력 혁명을 기도했다. 바리사이들에게 가라지는 율법을 어기는 이들, 이들을 뽑아버리는데 열중한 나머지, 용서와 자비를 외면했다. 쿰란(에쎄네) 종파에게 가라지는 세속 사람들, 이들로부터 자신들을 뽑아내어 광야에서 은수 공동체를 형성했다. 심지어 예수님의 제자들도 사마리아인들을 가라지로 여겨 하늘의 불로 태워버리려 하였다(루카 9, 52-56참조).
어느 시대, 어느 공동체이든 가라지 같은 사람이 보이기 마련이고 이들을 제거하려는 시도도 뒤따랐다. 함께하는 데에 걸림돌만 되고 공동체에 해악을 끼치는 듯한 천덕꾸러기들은 늘 눈에 띈다. 인간에게는 자신 안에 있는 모든 잘못된 것들을 단죄하고 퇴치하려는 갈망이 있다고 한다. 밀과 가라지의 비유는 실상 사회뿐 아니라 한 인간 내면에서 벌어지는 일의 상징으로 볼 수도 있다. 내 마음을 살펴보면 소중한 가치인 밀만 자라는 것이 아니라 불쾌하고 거북한 가라지, 즉 분노, 원한, 질투, 위선, 교만, 우울의 가라지도 함께 자라고 있다.
뽑아 버리고 싶지만 가라지를 뽑으려다가 밀도 함께 뽑힐 수 있다. 그러면 마음 밭에는 아무것도 자라지 못한다. 엄격하고 완벽하게, 아무런 결점 없이 살려는 집착이 마음 밭을 황폐하게 만들게 한다. 하나씩 뽑아 버릴 수도 없고 밭을 갈아엎을 수도 없는 난감한 상황인데, 이 가라지들을 어찌할 거나?
예수님께서는 가라지가 우리가 뽑을 대상이 아니라 추수 때 천사들을 통해 처리할 대상이라고 이르신다. 그렇다면 가라지는 계속 주목할 증오나 소외의 대상이 아니라, 언젠가 정리하실 주님께 눈을 돌리게 하는 도구가 아닐까? 가라지를 보며 뽑아버리려는 마음을 넘어서서 추수의 주인이신 주님을 볼 때, 좋은 씨가 담긴 내 마음 밭이 좋은 땅으로 변하기 시작할 것이다.
불가의 보왕삼매론에 "몸에 병 없기를 바라지 말라. 몸에 병이 없으면 탐욕이 생기기 쉽다. 병고(病苦)로써 양약(良藥)을 삼으라"라는 구절이 있다. 누구나 병이 걸리게 마련인데 병을 앓을 때 신음만 하지 말고 그 병의 의미를 깨달으라는 이야기다. 건강할 때 생각하지 못한 이웃에게 고마움도 느끼고, 인생을 어떻게 살아왔는가 성찰하는 계기로 삼는다면 병을 통해서 새로운 눈을 뜨게 되고, 결국 병고로 양약을 삼게 된다는 말씀이다. 같은 맥락에서 "세상살이에 곤란 없기를 바라지 말라. 세상살이에 곤란이 없으면 제 잘난 체하는 마음과 사치한 마음이 일어난다. 근심과 곤란으로써 세상을 살아가라." 하는 구절이 이어진다. 집안에 어려움이 있다고 나쁘게만 생각지 말고, 어려움을 겸손하게 받아들여 그를 디딤돌로 하여 일어서는 것이 곤란으로써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라 말로 들린다.
복음에 비춰보면, 질병이나 곤란이나 장애나 나쁜 상황 등의 가라지를 피할 것이 아니라, 그 가라지를 통해 자신을 돌아보고, 곤란 속에 겸손을 배우며, 장애를 넘어서는 의지와 세상을 받아들이는 지혜를 키우는 계기로 삼으라는 말씀으로 들린다. 가라지 때문에 밀이 부실해지는 것이 아니라, 가라지로 인해 더욱 성숙하고 건강한 밀이 되라는 초대다. 그것이 밀밭에서 가라지를 뽑아버리지 않고 밀과 더불어 자라게 하신 깊은 뜻 아닐까?
돌아보면, 내가 가진 내 기준으로 선과 악을 구별하여 악을 단죄하던 시절이 있었다. 무척 피곤했다. 하느님 자리에 내가 앉아 일일이 재판하듯 하느님 노릇을 하려니...... 들판을, 세상을, 내 속을 보면서 거기서 은총과 자비를 발견하고, 하느님의 인내하심을 되새김은 단죄의 사슬로부터 해방이자 넉넉한 축복이었다.
가라지가 있는 내 본심에 실망할 것도 아니고, 뽑아버리려고 덤빌 일도 아니다. 가라지 섞인 우리 실상을 있는 대로 인정하며 겸손하게 하느님께 눈을 돌리라는 초대 말씀을 마음에 새긴다. "당신께서는 힘의 주인이시므로 너그럽게 심판하시고, 저희를 아주 관대하게 통솔하십니다." (첫 독서) 밀뿐 아니라 가라지까지, 우리의 선함뿐 아니라 악하고 나약한 모습까지 받아들여 하느님께 봉헌하라는 말씀으로 들린다. 그때 둘째 독서의 말씀대로 성령께서는 부족한 우리를 위해 "몸소 말로 다 할 수 없이 탄식하시며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해 주신다. 가라지 섞인 밀밭일지라도 하느님께는 우리가 그렇게 소중하기 때문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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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등에 짐이 없었다면 나는 아직도 미숙하게 살고 있을 것입니다.
내 등에 있는 짐의 무게가 내 삶의 무게가 되어 그것을 감당하게 하였습니다.
이제 보니 내 등의 짐은 나를 성숙시킨 귀한 선물이었습니다.
내 등에 짐이 없었다면 나는 세상을 바로 살지 못했을 것입니다.
내 등에 있는 짐 때문에 늘 조심하면서 바르고 성실하게 살아왔습니다.
이제 보니 내 등의 짐은 나를 바르게 살도록 한 귀한 선물이었습니다.
내 등에 짐이 없었다면 나는 사랑을 몰랐을 것입니다.
내 등에 있는 짐의 무게로 남의 고통을 느꼈고 이를 통해 사랑과 용서도 알았습니다.
이제 보니 내 등의 짐은 나에게 사랑을 가르쳐 준 귀한 선물이었습니다.
내 등에 짐이 없었다면 나는 겸손과 소박함의 기쁨을 몰랐을 것입니다.
내 등의 짐 때문에 나는 늘 나를 낮추고 소박하게 살아왔습니다.
이제 보니 내 등의 짐은 나에게 기쁨을 전해준 귀한 선물이었습니다.
물살이 센 냇물을 건널 때는 등에 짐이 있어야 물에 휩쓸리지 않고,
화물차가 언덕을 오를 때는 짐을 실어야 헛바퀴가 돌지 않듯이
내 등의 짐이 나를 불의와 안일의 물결에 휩쓸리지 않도록 하였으며,
삶의 고개 하나하나를 잘 넘게 하였습니다. (익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