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라우렌시오 부제 순교자 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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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라우렌시오 부제 순교자 축일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씨 뿌리는 사람에게 씨앗과 먹을 양식을 마련해 주시는 분께서
여러분에게도 씨앗을 마련해 주실뿐만 아니라
그것을 여러 곱절로 늘려 주시고, 또 여러분이 실천하는 의로움의 열매도 늘려 주실 것입니다." (독서)
나에게 마련해 주신 씨앗, 내 삶을 통해서 싹 틔우고 키워서 열매를 맺게 할 씨앗은 무엇일까?
인간 누구에게나 주어졌고, 그것으로 살아가고, 그것만이 남게 되는 씨앗이 무엇일까?
"그가 가난한 이들에게 아낌없이 내주니, 그의 의로움이 영원히 존속하리라."(독서)
아낌없이 내주는 사랑이 영원히 존속하는 길이기에 사랑이 씨앗이라는 말씀으로 들린다.
그 사랑은 아낌없이 외아들을 내어주신 하느님의 사랑이자
피와 살을 내어주신 그리스도의 사랑 아닐까?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복음)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씨앗이 가야 할 여정을 이르시는 말씀으로 들린다.
우주 만물의 생존 이치이고 사람다워짐의 신비이기에 "진실로 진실로" 이르신 말씀,
주님 친히 살아가신 운명이기에 "진실로 진실로" 이르신 말씀,
내가 거기 참여할 때에만 보게 되는 신비이기에 "진실로 진실로" 따라야 할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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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알 이야기
밀알은 창고 안에서 완벽하게 행복하였다. 창고는 튼튼하였고, 습기도 없었으며, 함께 있는 친구들도 아주 착해서 다툼도 없었고, 그야말로 완벽하였다. - 이야기를 우리 삶에 비춰보자, 누구나 사업에서의 성공, 편안한 가족, 건강 등 인간적 행복을 추구한다. 그 행복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그것이 다일까? 혹시 창고 속 밀알의 행복은 아닐까?
그 밀알은 아주 경건하였다. 그는 하느님에게 감사한다. "주님, 당신이 제게 주신 것, 저를 제 창고 속에서 이토록 행복할 수 있게 해 주신 것에 감사합니다. 부디 이 행복이 영원히 지속되게 해 주십시오" - 밀알이 주님에게 감사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우려되는 것이 있다. 이 밀알이 혹 존재하지도 않는 하느님에게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어야 할 텐데. 창고 속의 행복을 누리지 못하는 이들에게 하느님께서는 어디 계실까? 오로지 창고 속 밀알의 작은 행복만을 만드신 하느님은 존재하지 않으며, 우상일지도 모른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하느님은 고맙게도 존재하지 않는다."(K. Rahner). 충격적인 표현으로 들리지만, 하느님을 자신의 생각 속에 붙잡아놓고 내가 간절히 원하는 것을 이루어 주시는 분으로 여기는데, 그런 하느님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진정한 하느님은 우리가 만든 도깨비방망이 같은 분이 아니라, 사람이 되신 하느님이신 예수님에게서 드러났듯 일상에서 죽고 썩는 밀알과 같은 분이라는 말이다.
어느 날, 사람들이 밀알 더미를 수레에 실어 들로 나간다. 들녘은 창고보다도 더 아름답고 상쾌하다. 그래서 푸른 하늘, 태양, 꽃들, 나무들 앞에서 밀알은 더욱더 하느님께 감사를 드린다. "주님, 감사하나이다. 이 모든 것이 너무도 아름답습니다!" - 이승의 아름다운 것들에 대하여 하느님에게 감사해야만 한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한 알의 밀일뿐이다. 하느님께서는 밀알을 밀알로만 남아 있게, 어떤 소출도 낼 수 없게 창고 속에 붙잡아 두시는 분이 아니시다.
사람들이 밀알을 막 갈아 놓은 땅에 묻는다. 밀알은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아무것도 듣지 못한다. 습기가 속까지 파고든다. 피할 수 없는 죽음을 통해 변화되어 무엇인가에 도달해야 하는 존재, 아름다운 이삭이 되어 가는 중의 밀알은 창고를 그리워한다. 죽음의 순간에 밀알은 '하느님께서 계시다면 이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절규할지 모른다. - 안타까운 일이다. 왜냐하면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는 거기에 진정한 하느님이, 즉 밀알의 상태에서 이삭의 상태로 변화하도록 하시는 하느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인간의 근원적 갈망인 새로운 세상은 땅에 떨어져 죽을 때에만 시작한다. 하느님은 우리를 창고에 보존하는 분이 아니라 땅에 떨어져 썩어서 새로 나고 성장하여 열매를 맺게 하시는 분이시다.(Jørgens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