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회원가입  |   로그인  |   오시는 길
우리는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이 세상에 정의와 평화를 가져오도록 노력한다.
(말씀의 길 회헌 47조 참조)
말씀의 숲
영성의 향기 말씀의 향기 수도원 풍경 세상.교회의 풍경 기도자리
말씀의 향기

연중 제19주일 가해

작성자 : 말씀의성모영보수녀회   작성일: 20-08-09 09:28   조회: 6,696회

본문

연중 제19주일 가해

왜 의심하였느냐?

 

독서와 복음은 하느님을 만나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첫 독서는 엘리야가 하느님을 만나는 이야기다. 우상숭배를 일삼는 거짓 예언자들을 물리치고도 정치적 박해로 실의에 빠져 도망치던 예언자 엘리야. 그 앞에 하느님이 나타나시는 모습은 상상 밖이다: 바위를 산산조각 내는 격렬한 바람, 지진, 불길(이 모든 현상은 구약에서 힘 있고 무서운 하느님의 표징이었다)이 아니라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 가운데 나타나신다.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는 우리 일상에서 흔히 접할 수 있기에 알아듣기 힘들다. 무의미해 보이는 매일매일의 소소한 일 가운데 주님께서 현존하고 계심을 암시한다. 하느님께서는 작은 일을 통해서  오신다는 말씀으로 들린다.

복음은 물 위를 걸으시는 예수님을 통해 제자들이 하느님을 만나는 이야기다. 한밤중에 배를 타고 가다가 심한 풍랑을 만난 제자들, 이 위기 상황에서 나타나신 예수님은 “유령이다!” 하며 소리를 질러 대는 제자들에게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라고 이르신다. 특이한 점은 풍랑을 가라앉힐 수 있는 주님께서 풍랑 속에 나타나신 점이다. 왜 그러셨을까? 우리가 일상 당하는 역경이나 시련, 유혹과 좌절은 그저 없어져야 할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주님을 만나는 은총의 순간임을 일러주시려는 의도가 아닐까? 풍랑이 없기를 바라기보다, 풍랑 속에서 함께 계시는 주님을 발견함으로써 어려움 가운데 믿음이 커지라는 뜻 아닐까? 하느님을 믿고 살아가는 여정 중에 우리들도 자주 세상 풍랑을 만난다. 시련과 어려움, 유혹과 회의, 의심 등 크고 작은 풍랑들은 우리를 위험에 빠지게 한다. 이 풍랑들을 주님을 만나는 계기로 삼으라는 말씀으로 들린다.

풍랑을 극복할 힘은 무엇일까? 베드로는 물 위를 걸으시는 예수님으로부터 “나다”(탈출 3, 14. 이래 성경에서 하느님 현현을 표현하는 전문용어) 하는 말씀을 듣자 예수께 "주님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하고 청한다. 예수께서 "오너라." 하시고 베드로는 배에서 내려 물 위를 걸어간다. 그러나 풍랑을 보자 무서운 생각이 들어 물에 빠져 버린다. 그러자 "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 하고 비명을 지르는 베드로에게 주님은 손을 내밀어 붙잡아 주시고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하고 물으신다.

“왜 의심하였느냐?"하는 물음에서 "의심하다"로 번역된 그리스어("distazo")의 본래 의미는 "자신 안에서 둘로 갈라져 떨어져 나간 상태"를 뜻한다. 라틴어의 dubbium(여기서 double, 즉 '둘'이라는 영어 단어가 파생한다), 독일어의 zweifeln(둘)도 비슷하다. “오너라”하시는 말씀을 온전히 받아들여 주님과 하나였을 때 베드로가 물 위를 걷지만, 두려움에 말씀과 자기 자신이 둘로 갈라지자(의심) 물에 빠진다.  다정한 친구 사이에서는 눈빛만 보아도 서로를 알고 받아들인다. 마음이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음이 둘로 갈리면, 친구가 하는 짓 하나하나가 의심스럽고 잘못되었고 자신에게 손해를 입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전에는 유쾌했던 장난조차 불쾌하고, 어떤 의미로 저럴까 하는 의심에 의심이 꼬리를 무는 불안한 망상으로 이어진다. 그것이 물에 빠지는 것이다.

"재난의 원인"이라는 톨스토이의 단편이 있다. 담장을 사이에 두고 사이좋은 두 집이 있었다. 어느 날 이쪽 집의 암탉이 담을 넘어 저쪽 집에 가서 알을 낳았다. 이쪽 집 아이가 그것을 두고 우리 집 닭이 너희 집에 계란을 낳았으니 가져오라고 했다. 그 집 아이가 알을 찾지 못해서 없다고 했다. 그러자 아이들은 한 쪽은 알이 있다 하고 한 쪽은 알이 없다 하며 싸웠다. 이것을 보고 있던 어머니들이 나와 싸웠다. 어머니들의 싸움을 보고 있던 아버지들이 나와 싸웠다. 너무 화가 나서 이쪽 집 가장이 저쪽 집에 불을 질러 버렸다. 바람이 휙 돌아 불어서 이쪽 집도 다 타버렸다. 그들은 잿더미에 앉아 별을 쳐다보면서 하룻밤을 지내며 반성했다. 그들이 싸운 이유는 무엇이었나? 의심이었다. 의심은 상대방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더 나아가 한 번 믿지 못하면 계속해서 그를 믿지 않는다. 결국 집을 날리거나 인생을 망치는 재난을 초래한다. 물에 빠지는 것이다.

의심암귀(疑心暗鬼)라는 말이 있다. 의심하는 마음이 있으면 어두운 곳에서 귀신이 나온다는 뜻이다. 한번 의심하기 시작하면 아무 일도 아닌 것을 가지고 갖가지 망상에 빠져 이런저런 드라마를 혼자 만들다가 분노와 두려움과 걱정으로 판단력을 읽고 인간관계나 가정이 파탄을 겪는 경우가 허다하다. 의심이야말로 사람을 파멸시키는 귀신이고, 물에 빠지게 하는 망령이자, 집을 태워먹는 재앙이다.

물에 빠지고, 집을 태워먹고, 막장 드라마를 쓰다가 관계가 파괴되는 의심에서 나올 길은 무엇일까? 베드로를 다시 보자. 그도 우리와 같은 인간이다. 세 번씩이나 주님을 배반한 약한 인간이다. 주님의 말씀을 따르며 의심도 했다. 그래서 물에 빠지는 위험도 겪는다. 그러나 그 위기에서 "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하고 절규하는 용기가 있었다. 주님은 그에게 당신 손을 내밀어 붙잡아 주셨다. 마음이 둘로 갈라져 죽을 위험에 처했으나 다시 하나가 됨으로써 물에 빠져 죽을 위험에서 살아난다. 그때 비로소 “스승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한다.

풍랑 속에서 주님의 손을 잡고, 의심을 버리고 주님과 다시 하나가 되는 길이 신앙인의 여정 아닐까?. 그리스도교의 모든 성사는 신앙인과 하느님의 하나 됨으로 모아진다. 세례는 그리스도와 합체, 곧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는 성사요, 고해는 하느님과 멀어진 삶에서 돌아서서 화해로 다시 일치를 이루는 길이다. 병자성사는 우리의 병고까지도 그리스도의 수난에 하나로 합치는 성사요, 모든 성사의 중심인 성체성사는 예수님을 받아 모시고 예수님과 하나가 되는 성사다.

집을 태워먹고, 이성을 잃고 망상에 빠져들게 하는 의심암귀를 물리칠 길이 여기 있다. 마음이 둘로 갈라졌을 때 닥쳐오는 위험만 보지 말고 주님을 보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의심에서 허우적대지 말고 주님께 구해달라고 외치고, 손을 내미시는 주님과 다시 하나가 될 때, 우리는 인생과 역사 안에 살아 계시는 주님을 알아뵙고, 어떠한 시련에도 의연하게 맞서며, 아버지께서 주시는 평화를 그리스도와 함께 누리게  된다는 초대로 말씀이 다가온다.



 

해뜨는 마을 l 영보자애원 l 영보 정신요양원 l 천안노인종합복지관
교황청 l 바티칸 뉴스 lCBCK 한국천주교주교회의
한국 천주교 여자수도회 l 한국 천주교 주소록 l 수원교구
우. 13827 경기 과천시 문원청계길 56 말씀의성모영보수녀회
56 MunwonCheonggyegill Gwachon-si Gyeonggi-do TEL : 02-502-3166   FAX : 02-502-8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