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8주일 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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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8주일 가해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배가 고픈 사람들 오천 명을 먹이신다. 극복하기 힘든 가난, 불공평함과 억울함, 무의미나 우울함 등의 여러 형태로 갈증과 허기는 오늘도 계속된다. 오늘 우리에게 빵의 기적이 다시 일어날 방도는 없을까? 이런 갈망으로 예수께서 어떻게 기적을 일으키셨는지 살펴본다.
빵을 나눠주기에 앞서 예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라고 한다. 사람을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 기적의 출발점이었다. 그래서 먹을 것이 없으니 군중을 돌려보내자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라고 이르신다. 제자들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가진 것이 없다고 난감한 상황을 말씀드린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먼저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그것을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라고 한다.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는" 모습을 두고 요한복음은 "감사를 드리셨다."라고 표현한다. 찬미와 감사를 드리시는 모습에 배고픈 사람들을 먹일 비밀이 숨겨 있다. 성경에서 쓰인 "감사 Eucharistia"라는 말의 어원은 "선물에 대한 응답(thanksgiving)", 즉 내게 주어진 은총을 다시 알고 응답한다는 뜻을 지닌다. 현실을 고마워하는(thanks) 이유가 내 삶의 조건이 하느님의 선물(giving) 임을 깨달음이 감사요, 그 표현이 찬미다. 내 손에 주어진 빵 한 쪽이 어디서 왔는지 바로 알 때 기적이 시작된다. 오천 명이 먹이기에는 턱도 없이 부족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의 뿌리는 하늘, 곧 하늘에 계신 당신의 아버지 하느님이셨다. 그러기에 예수께서는 하늘을 우러러 감사드리신다. 교회는 '성체성사'를 "감사 Eucharistia"라고 부른다.
세상살이를 위해서는 턱도 없이 부족한 내 수입, 내 건강, 내 재능, 나의 삶의 조건들을 보며 실망하거나 무력감에 빠질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부족하고 부실한 현실이지만 분명 내게 주어진 현실 안에 하느님의 사랑이 담겨 있음을 보고 하늘을 우러러 감사드릴 때 세상이 달라진다. 배고픔을 채우기에 부족한 한 그릇의 밥 앞에서 농부의 땀방울을 보고, 벼 이삭에 담긴 봄바람, 장맛비, 태풍과 별빛의 흔적을 발견하며, 이 모두의 주인이신 하느님의 섭리를 다시 아는 것이 감사다. 그렇게 감사할 때 마음은 한없이 너그러워지고, 그 마음으로 작은 것을 나누게 되고, 그때 오천 명이 먹고 남을 사랑이 넘칠 것이다. 기적은 그렇게 감사 속에 현실이 된다.
믿는 사람들은 감사하는 사람들이다. 캄캄한 밤에도 별을 보고 하느님께 감사드린다. 검은 구름을 보면서도 그 속에 있을 태양 때문에 감사한다. 슬픔 가운데서도 소망이 있기에 감사한다. "만일 다리를 한 쪽만 잘렸으면 하느님께 두 다리가 다 잘리지 않은 것을 감사하라. 만일 두 다리가 잘렸으면 하느님께 목이 부러지지 않은 것을 감사하라. 만일 목이 부러져 버렸으면 그 뒤는 걱정할 일이 없음을 감사하라."(탈무드) 왜 감사드려야 할까? "하느님은 촛불을 보고 감사하면 전등불을 주시고, 전등불을 보고 감사하면 달빛을 주시고, 달빛을 감사하면 햇빛을 주시고, 햇빛을 감사하면 천국을 주신다. 하늘을 향한 감사의 생각은 그 자체가 기도이다." (C. H. 스펄젼).
"10대의 자녀가 반항을 하면 그건 아이가 거리에서 방황하지 않고 집에 잘 있다는 것이고, 지불해야 할 세금이 있다면 그건 나에게 직장이 있다는 것이고, 손님들이 다녀가고 치워야 할 게 너무 많으면 그건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는 것이고, 옷이 몸에 좀 낀다면 그건 잘 먹고 잘 살고 있다는 것이고, 주차장 맨 끝 먼 곳에 겨우 자리 하나 있다면 그건 내가 걸을 수 있는 데다 차도 있다는 것이고, 교회에서 뒷자리 자매님의 엉터리 성가가 귀에 거슬린다면 그건 내가 들을 수 있다는 것이고, 삶이 이렇게 괴롭다면 내가 잘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뜻이다." (익명)
예수님께서 감사 기도를 드리고 나눠주신 빵은 실상 당신 자신의 몸을 예시한다. 이 빵은 돌아가시기 전 날 당신의 몸과 피를 받아먹으라고 건네주시고, 끝내 십자가상에서 목숨을 내어 주셨음을 암시한다. 하느님은 예수님을 통하여 사람이 되시고 더 나아가 우리를 위한 생명의 빵, 살아있는 빵이 되셨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느님의 사랑으로, 그 사랑으로부터 우리를 갈라놓을 수 있는 것은 없다(제2독서)고 바오로 사도는 역설한다. 그렇게 우리를 거저 먹이시는 사랑(제1독서)을 받아들임이 감사이고 그 기념이 감사제인 미사라는 뜻으로 말씀이 다가온다.
세상살이의 어려움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바오로 사도가 말한 환난, 역경, 박해, 헐벗음, 위험, 칼은 여전히 우리 곁에 있다. 밖으로부터 만이 아니라 안에서도, 가족과 동료들 사이에서뿐 아니라 자신 안에서도 실망이나 분노나 아픔이나 무기력은 이어진다. 이를 해결하려고 일에 매달리거나 통곡도 하고 기도도 하겠지만, 그래도 풀리지 않는 배고픔을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 무엇으로 자신을 먹일 수 있을까?
길은 하나, 배고픈 나를 측은히 바라보시는 주님을 마주함 아닐까? 인간에 대한 측은함을 담아 하늘을 우러러 아버지께로 눈길을 올리시는 예수님, 아버지의 사랑에 감사드리며 우리에게 빵으로 당신을 주시는 예수님을 보고, 받아 모시라는 초대를 듣는다. 우리는 하느님을 예수님 안에서 뵙는다. 복음에서 배불리 먹고 남은 것이 얼마였던가? 세상의 어떤 역경이나 위협도 갈라놓을 수 없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 모시고, 우리도 서로 그 사랑을 나눌 때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를 가득 채우고 남으리라는 소식을 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