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회원가입  |   로그인  |   오시는 길
우리는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이 세상에 정의와 평화를 가져오도록 노력한다.
(말씀의 길 회헌 47조 참조)
말씀의 숲
영성의 향기 말씀의 향기 수도원 풍경 세상.교회의 풍경 기도자리
말씀의 향기

연중 제24주일 가해

작성자 : 말씀의성모영보수녀회   작성일: 20-09-14 10:29   조회: 6,186회

본문


연중 제24주일 가해

 -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베드로의 질문으로 용서에 관한 말씀이 시작된다. 말씀의 맥락은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이라는 표현에 드러나듯, 남의 일이나 사회적 사건이 아니라, 나에게 직접 피해를 끼친 경우다. 예수님 당시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되갚는 동태 복수법, 세 번까지 용서하라는 가르침 등 용서에 관한 여러 주장이 있었다고 한다. 베드로가 질문한 "일곱 번"은 대단히 많은 경우다.

예수님은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즉, 무제한 용서하라고 대답하신다. 현실성 없이 들린다. 왜 그렇게 해야 하나? "너희가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라는 결론으로 예수님은 그 이유를 제시하신다. 용서의 근거가 나의 너그러움에 있지 않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있기에 형제의 용서가 가능하고, 또 실천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성서 본문에 쓰인 "용서하다(aphiemi)"는 단어는 "가게 하다. 풀어주다. 놓아버리다"의 의미도 지닌다. 용서를 뜻하는 라틴말(perdonar) 구성은, “per(-을 위해서) + donare” (내어주다)/ (영어 for + give =forgive)이다. 상대를 위해 내어주고, 그 내어줌을 받아들임이 용서다. 나를 위해 외아들을 내어주신 하느님의 사랑을 내가 받아들임이 용서의 근원이다. 내 눈을 내게 잘못한 이로부터 자비로우신 하느님께 돌릴 때 용서가 가능하고, 그때 분노와 원한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섭리하시는 감사와 기쁨으로 바뀐다. 그렇게 용서는 집착에서 풀려나고, 원한을 놓아버리는 선물이다.

한 자매님이 찾아와 며느리 때문에 아들과 싸운 뒤 3년째 말을 하지 않고 지내는데 너무 괴롭다고 호소하였다. 화해를 하라고 권하니, 자신은 화해하고 싶지만, 아들이 먼저 사과하기 전에는 결코 그럴 수 없다고 한다. 그래도 먼저 화해하라고 권했다. 며칠 후 연락이 왔다. 망설임 끝에 아들에게 전화를 했더니, 전화를 받자마자 아들이 잘못했다고 사과를 하더란다. 아들과 화해를 권해서 고맙다는 전화였다. 먼저 손을 내밀어야 용서가 이루어진다. 용서하기 힘든 이유는 대개 조건을 달기 때문이다. 상대방이 먼저 사과하면 모든 것을 용서하겠다는 식으로 조건을 다는 이유는 나는 옳고 상대방은 그르다, 혹은 나는 피해를 입었고 상대방은 내게 상처를 준 나의 적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상대방이 나의 적인 한 용서와 화해는 불가능하다. 용서하기 힘든 상대방은 나에게 항복해야 하는 나의 적이 아니라, 그 역시 자기가 옳다고 믿으며 한 편으로는 화해를 기다리는 한 인간이다.

용서의 과정을 로마노 과르디니는 이렇게 통찰한다. "용서하기 위해 인간은 '적과 상대한다'는 감정을 극복해야 한다. 적대감은 짐승 안에도 있다. 생명을 지닌 존재는 상처를 입을 수 있기에 누구나 적대감을 가지고 산다. 내게 손해를 끼친 타자는 나의 적이기에 불신과 두려움과 혐오의 감정이 생기고, 적으로부터 나를 보호하려고 한다. 상대방에 대해 항상 공격 태세를 갖춤으로써 나를 방어하려 한다. 그것이 본능에 따른 짐승의 차원이다.

동물이 아닌 인간의 용서는 이러한 본능적 증오의 방어태세를 포기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의 본래 모습인 하느님 자녀로서의 품위는 어느 누구에 의해서도 손상될 수 없음을 깨달아야 한다. 그때 본능적 적대감을 극복하고 증오의 방어태세 없이 존재하게 된다. 용서하는 자가 두려워하는 자와 증오하는 자보다 강하다."

두려움과 증오와 적대감과 공격성과 웅크린 방어에 머물면 짐승이다. 하느님 모상이기를 포기한 삶이다. 하느님의 모상인 인간은 용서를 통해 두려움에서 해방되고 적대감을 놓아버리고 웅크린 두려움에서 풀려나, 하느님의 자비를 받아들이고 형제와 화해하는 존재다. 그러기에 용서는 상대방보다도 나를 위한 것이다. 달라이 라마는 용서의 결실을 이렇게 가르친다: "용서는 단지 우리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것만을 의미하진 않는다. 그것은 그들을 향한 미움과 원망의 마음에서 스스로를 놓아주는 일이다. 그러므로 용서는 자기 자신에게 베푸는 가장 큰 자비이자 사랑이다. "

만일 끝까지 용서를 거부하면 어떻게 될까? 예수께서는 이에 관해 자비를 입은 종이 석방 후 벗에게 무자비하게 굴다가 다시 수감되는 비유를 들려주시며 “너희가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라고 이르신다. 하느님 자비의 본성을 밝혀주는 말씀이다. 받은 자비는 나눌 때만이 그 자비가 살아 숨 쉬며 완성된다. 받기만 하고 나누지 못할 때 자비는 생명력을 잃는다. 풀려났다가 다시 감옥에 들어가는 꼴이다. 무자비한 종에게 자비가 거두어짐은 하느님의 변덕이 아니라, 자비의 본성을 살지 못하는 자신의 무자비함 탓이다. 무자비의 결과는 그렇듯 스스로 원망과 집착의 감옥으로 다시 들어가 짐승으로 살게 한다.

하느님의 모상으로, 아들딸로 살 것인가? 짐승으로 살 것인가? 선택은 우리 몫이다. 용서를 체험하고 하느님의 모상으로 사는 이는 이렇게 노래한다.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네 모든 잘못을 용서하시고, 네 모든 아픔을 없애시는 분. 끝까지 캐묻지 않으시고, 끝끝내 화를 품지 않으시네. 우리를 죄대로 다루지 않으시고, 우리의 잘못대로 갚지 않으시네. 해 뜨는 데서 해 지는 데가 먼 것처럼, 우리의 허물들을 멀리 치우시네." (화답송)



 

해뜨는 마을 l 영보자애원 l 영보 정신요양원 l 천안노인종합복지관
교황청 l 바티칸 뉴스 lCBCK 한국천주교주교회의
한국 천주교 여자수도회 l 한국 천주교 주소록 l 수원교구
우. 13827 경기 과천시 문원청계길 56 말씀의성모영보수녀회
56 MunwonCheonggyegill Gwachon-si Gyeonggi-do TEL : 02-502-3166   FAX : 02-502-8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