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회원가입  |   로그인  |   오시는 길
우리는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이 세상에 정의와 평화를 가져오도록 노력한다.
(말씀의 길 회헌 47조 참조)
말씀의 숲
영성의 향기 말씀의 향기 수도원 풍경 세상.교회의 풍경 기도자리
말씀의 향기

연중 제28주일 가해

작성자 : 말씀의성모영보수녀회   작성일: 20-10-12 09:58   조회: 6,213회

본문

연중 제28주일 가해

 하늘 나라의 혼인 잔치

 
독서와 복음은 잔치 이야기를 들려준다. 첫 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하느님께서 잔치를 베푸시어,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 내시고, 당신 백성의 수치를 온 세상에서 치워주실" 날을 선포한다. 복음은 하늘나라를 아들의 혼인 잔치에 임금이 사람들을 초대한 사건에 비유한 말씀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이 초대를 거부하기도 하고, 초대를 전하는 이들을 죽이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참석은 했으나 예복을 입지 않아 쫓겨났다는 이야기다.

비유 말씀은 기본적으로 하느님께서 아들 예수님을 통해 인간을 구원으로 초대하셨는데, 이를 거부하거나, 초대에는 응했지만 준비를 못 해 제외되는 사람들로 엮어진 구세사 이야기로 볼 수 있다. 성경은 살아있는 하느님 말씀으로 다층적이기에 여러 차원에서 해석하여 영혼의 양식을 삼을 수 있다. 더욱이 "비유는 시대를 뛰어넘는 역동성과 현실성을 지니기에"(J. Jeremias),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의미를 찾아야 한다. A. 그륀은 이 비유를 인간 각 개인의 삶 속에서 벌어지는 사건, 즉 심층적 차원에서 "인간이 되어가는 여정"으로 해석한다. (이하 "예수, 구원의 스승", 134-142 참조)

초대란 부르심, 곧 소명을 받았다는 말이다. 신앙인이 하느님으로부터 초대받았다는 말씀은 믿는 이에게 소명이 주어졌음을 의미한다. 어떤 소명일까? 임금은 혼인 잔치에 사람들을 초대하였다. 혼인은 남자와 여자가 하나가 되는 합일의 성사다. 하늘 나라의 혼인잔치란 하느님과 인간의 합일, 그리스도와 교회의 합일의 잔치를 뜻한다. 합일, 혹은 친교를 뜻하는 라틴어 communio는 cum + unus의 합성어; 영어로 풀자면 with + one; 즉 '더불어 하나됨'이다. 이 communio는 미사에서 영성체를 지칭한다. 믿는 이는 그리스도를 모시고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고, 하느님과 하나이신 그리스도와 일치함으로써 삼위일체의 신비 안에 들어가 神化 되도록 초대받았다. 즉, 신앙인이란 그리스도와의 합일을 통하여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소명을 받은 사람이다. 신앙의 목표는 단순히 마음의 평화를 누리거나, 지옥을 면하고 천당에 가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과 하나가 되어 신적인 존재로서 이루어지는 구원이 신앙의 참 목표다.

주님은 우리가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길로 초대하셨는데, 이 초대에 "아랑곳하지 않고, 어떤 자는 밭으로 가고 어떤 자는 장사하러 갔다". 눈앞의 일에 매달려 인간의 소명을 외면하는 모습이다. 게다가 어떤 이들은 초대를 전한 주인의 "종들을 붙잡아 때리고 죽였다". 인간의 자기중심적 본능은 자기 밖으로 나오라는 초대, 자신을 넘어서라는 영적인 초대를 일부러 없애버리는 경향이 있음을 암시한다. 그러자 왕은 "악한 사람 선한 사람 할 것 없이 만나는 대로 데려왔다".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사회적 자격이나 윤리적 조건은 없다. 죄인이든 악인이든, 배웠든 못 배웠든, 젊든 나이 많든, 모든 이가 초대받았음을 뜻하는 말씀이다. 더 나아가 인생의 모든 것이 하느님과 하나가 되도록 초대받았다. 내 안의 모든 영역, 의식과 무의식, 방황과 갈망, 선행의 기억과 악행의 부끄러움까지도 모두 하느님의 초대에서 제외되지 않았다는 위로의 말씀이다.

그런데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이 있었고, 임금은 이들을 잔치에서 내쫓는다. 혼인 예복이 무엇일까? 당시 관습에 따르면 혼인잔치에 초대할 때는 예복도 함께 보냈다고 한다. 따라서 비유에서 혼례복이란 초대하신 분의 선물을 의미한다. 혼례복을 입는 것은 이전의 옷이 아닌 초대하신 분이 주신 옷을 입는 행위다. 초대를 진지하게 받아들여서 이전과는 다른 모습으로 변화된 태도가 바로 혼인 예복을 입은 모습이다. 이전의 옷은 자기가 선택하여 입었던 옷으로 자기중심적인 삶을 상징했다면, 혼례복은 선물로 받은 옷으로 보내신 주님 중심의 삶을 뜻한다. 이렇게 혼인 예복을 내가 입으면, 나의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 된다. 혼례복을 입음으로 자신 안의 장점과 단점, 인생에서 겪은 기쁨과 슬픔, 아픔과 상처 모두가 주님께 받아들여진다.

혼인 예복을 입지 않는 사람, 인생의 모든 것이 주님의 은총임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도 있다. 이들은 어두움에 싸인 이기심을 적당히 감추고 잔치를 즐기려 한다. 그런데 모든 어둠이 드러나는 하늘나라의 잔칫상에서 어둠은 숨을 곳이 없다. 어둠이 갈 곳은 어둠뿐이다. 예복 없이 잔치에 들어온 이들을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라는 말씀은 이를 뜻한다. 예복을 입지 않아 어둠 속으로 던져지고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라는 섬뜩한 말씀은 실상 참된 자기실현, 진정한 행복으로의 초대 말씀이다. 인간 안에는 선과 악, 빛과 어둠이 공존한다. 우리 안에 무엇이 있는지 의식하고, 그 위에 하느님께서 주시는 예복, 즉 우리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조건 없는 사랑의 옷을 입으라는 초대다. 하느님께서 주신 예복을 입지 않고 내 방식대로 살면, 우리의 삶은 자기 파괴와 절규와 울부짖음으로 끝나기 때문이다.

한 젊은이가 여행을 하다 보니 일곱 명의 인부가 정으로 돌을 쪼고 있었다. 젊은이가 첫 인부에게 물었다. "지금 무슨 일을 하는 겁니까?" 인부가 투덜거리며 말했다. "이 지겨운 일이 끝날 때까지 시간이나 때우는 거지." 둘째 사람에게 물어보자 "식구들과 먹고살려고 돈을 버는 중이라오." 다음 사람에게 질문을 하자 "보다시피 아름다운 조각을 깎고 있소." 네 번째 인부에게 물으니 "성당을 짓는 중이오." 다섯 번째 사람에게 묻자 "성당 건축을 통해 마을 사람들과 나중에 태어날 후손들을 돕고 있다오." 여섯 번째로 묻자 "앞으로 여기서 하느님을 예배할 사람들을 섬기고 그 일을 통해서 나 자신을 깨우치고자 성당 건축을 돕고 있소." 끝으로 한 사람이 남아 있었다. 나이는 많아 보였지만 눈이 빛났고 입가에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지금 노인께서는 무슨 일을 하고 계신 겁니까?" 노인이 웃으며 대답했다. "내가 무얼 하고 있느냐고? ‘나’라는 물건은 여러 해 전 하느님께 흡수당했다네. ‘나’가 있어야 그자가 뭔가를 하지. 지금 하느님께서 이 육신으로 일하고 계시는 걸세!"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을 두고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하고 물으면 어떻게 답하겠는가? 인생이라는 지겨운 시간을 때우고 있는가? 먹고살려고 돈을 버는 중인가?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초대에 감사의 예복을 입고 참여하고 있는가? 주님께서는 하늘나라의 혼인잔치, 곧 주님과 하나가 되는 잔치에 우리를 초대하셨다. 우리는 초대에 응해서 이렇게 주님 앞에 나왔다. 내가 입고 있는 옷은 어떤 옷인가 살펴보자. 아직도 옛날 옷을 입고 있다면, 아직도 이기적 자아에 묶여 자기중심적 생각을 하고 있다면 얼른 잔치 예복을 입자.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20)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처럼, 주님께서 주신 예복을, 주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을 모심으로 주님을 입는다면 삶은 내가 아닌 하느님께서 내 안에서 일하시는 잔치가 될 것이다.

 



 

해뜨는 마을 l 영보자애원 l 영보 정신요양원 l 천안노인종합복지관
교황청 l 바티칸 뉴스 lCBCK 한국천주교주교회의
한국 천주교 여자수도회 l 한국 천주교 주소록 l 수원교구
우. 13827 경기 과천시 문원청계길 56 말씀의성모영보수녀회
56 MunwonCheonggyegill Gwachon-si Gyeonggi-do TEL : 02-502-3166   FAX : 02-502-8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