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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이 세상에 정의와 평화를 가져오도록 노력한다.
(말씀의 길 회헌 47조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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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 제3주일 나해

작성자 : 말씀의성모영보수녀회   작성일: 20-12-14 15:48   조회: 6,472회

본문


대림 제3주일 나해  -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께서 서 계신다.

 
대림절 셋째 주일은 우리를 기쁨으로 초대한다(장미주일). 첫 독서에서는 "주 하느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 나는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고, 내 영혼은 나의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리니"라고 기쁨을 노래한다. 둘째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라고 권고한다. 누구나 말씀대로 기쁘게 살고 싶지만 바라는 대로 늘 기쁘지는 않다. 왜 그럴까?

기쁨을 만족으로 오해하기 때문일지 모른다. 기쁨은 만족과 다르다. 만족은 소원이 이루어진 상태, 곧 지나간 어떤 것이지만, 기쁨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현재를 말한다. 사회심리학자들은 우리 사회를 만족은 있지만 기쁨이 없는 상태라고 분석한다. 사람들은 대부분 더 많은 물건, 더 맛있는 음식, 더 큰 재미를 원하지만 잠시 만족할 뿐 기쁘지 않기에 다시 다른 만족을 추구하게 된다. 지난 결과의 만족은 지금 여기의 기쁨과 다르다.

 만족이 아닌 참 기쁨은 언제 오나? 자신의 삶에서 언제가 가장 기쁜 순간이었는지 돌아보면 답이 나온다. 그 순간은 만남의 순간이다. 기쁨은 물질이 아닌 인격적 만남에서 온다. 그런데 모든 만남이 기쁘지는 않다. 어떤 만남은 슬픔이나 쓰라림을 주는 악연이 되고, 어떤 만남은 기쁘지만 곧 사라진다. 어디서 어떻게 참으로 기쁘고 영속적인 만남이 올 것인가?

오늘 첫 독서에서 이사야는 하느님께서 기름을 부어주시는 메시아가 오면 억눌린 자들에게 자유를 주며, 찢긴 마음을 싸매 주고 포로들에게 해방을 선포하실 것이라고 약속한다. 메시아와의 만남이 기쁨을 가져온다는 말씀이다. 복음에서 이 메시아를 증언하려고 온 세례자 요한이 그분이 어디 계신지 전한다. 메시아는 놀랍게도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께서 서 계신다."라고 요한이 외친다. 여기서 "너희 가운데"의 의미는 "너희 손이 닿는 곳"을 뜻한다. 즉 기쁨을 가져다줄 메시아는 이미 사람들 가운데, 우리 손이 닿는 곳에 와 계신다는 선언이다. 그런데 등잔 밑이 어둡다고, 이미 와 계신 분을 보지 못하고 있기에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실정은 아닐까?

서양의 한 수도원 실화다. 노인들만 남아 쇠락해 가던 수도원 원장이 공동체를 살릴 방편을 두루 찾다가, 한 원로로부터 "여러분 중에서 수도원을 다시 일으킬 메시아가 있다."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 말을 전해 들은 수사들은 그게 누굴까 곰곰 생각하였다. 수사들은 혹시라도 상대방이 메시아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에 서로를 존중하는 자세로 대했다. 물론 자기는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자신에 대한 존중감도 높여갔다. 교외에 있던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수도원 내에 흐르는 새로운 기운을 느끼게 되었다. 늙은 수사들끼리 보여주는 서로에 대한 극진한 존중과 겸손하면서도 당당한 모습이 좋았다. 사람들은 이 분위기가 좋아 소문이 나고 수도원을 찾는 발길은 나날이 늘어났다. 그렇게 방문한 젊은이들 중의 한 사람이 이곳에 남아 수사 생활을 시작하였다. 차차 다른 젊은이가 합류하였다. 이 수도원은 몇 년 지나지 않아 젊은 수도사들로 북적 이는 옛날의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고 한다.

우리가 기다리던 메시아는 "우리 가운데에 서 계신다." 늙은 수사들이 서로를 메시아로 대했듯 늙고 병든 부모를, 철부지한 자식을, 못마땅한 형제들을, 거북스러운 이웃을 메시아 대하듯 존중하고 사랑할 때에 진정한 만남이 이루어지고 기쁨을 누린다. 그때 우리 집안이, 공동체가, 세상이 달라지지 않을까? 우리 가운데 메시아가 계심을 인식할 때, 주변 사람들을 다른 모습으로 보게 되고, 내 삶도 달라진다. 이처럼 내 곁의 사람들을 통해서 주님께서 가까이 계시다는 체험이 우리에게 참 기쁨을 가져다줄 것이다.

코로나19 전염병이 한창이다. 그런데 초대 교회는 전염병 속에서 성장한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초세기 로마 제국 치하에서 교회는 미개한 집단 취급을 받았다. 사형수 예수를 숭배하며 자비와 형제애를 가르쳐 로마의 미풍양속을 해친다고 박해를 당하는 소수 집단이었다. 서기 165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통치기에 가공할 역병이 로마 제국을 강타했다. 전염병으로 시민의 3분의 1이 사망했다. 서기 251년에 다시 역병이 로마 제국 전역을 휩쓸었다. 로마 제국은 속수무책이었다. 감염된 사람들을 내다 버리거나 이들과의 접촉을 피해 도망 다녔고, 정치인이든 의사든 부유한 이들은 로마를 버리고 시골로 달아났다. 자식이 부모를, 부모가 자식을 버리는 상황에서 도시에는 죽은 이들의 시체가 쌓이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에 예외가 있었다. 바로 '갈릴레아인들'이라 불렸던 그리스도인들이었다.

그리스도인들은 역병이 창궐하는 상황에서 환자들에게 다가가 상처를 닦아주고 음식을 주며 회생하도록 보살폈다. 그들은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감염의 위험을 감수한 것이다. 당시 서구 사람들은 노력하지 않는 자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자비를 병리학적 감정이라고 비난했었다, 플라톤은 걸인 문제의 해결책으로 거지들을 국경 바깥에 내다 버리라는 제안을 하기도 했다. 이렇게 그리스도교를 비난했던 이교도들은 죽음을 무릅쓴 신앙인들의 자비와 봉사를 보고 그리스도인들을 ‘파라볼라노이’, 곧 ‘위험을 무릅쓰는 이들’이라고 불렀다. 그리스도인들은 환자들을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님 대하듯 하였고, 로마인들은 그러한 그리스도인들에서 진정한 신의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그들이 섬기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 결과 믿는 이들이 급작스럽게 증가하였다. 이전에 천여 명에 불과했던 그리스도인들은 312년까지 세대마다 50만 명씩, 10년마다 40%의 신자 수가 수직으로 상승하였다. 사랑이 그리스도교의 생명력이었다. "우리 그리스도교인 형제들은 대부분 위험을 무릅쓰고 아픈 자를 도맡아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필요를 공급하고 섬겼습니다. 그리고 병자들과 함께 평안과 기쁨 속에 생을 마감했습니다... 우리 형제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들의 죽음은 어느 모로 보나 순교와 다를 바 없습니다." (디오니시우스) 

교회는 대림 제3주일을 자선 주일로 지낸다. 자선은 어려운 이들에게 단순히 몇 푼 적선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예수님처럼 대하는 신앙 실천이다. 서로가 상대방 안에서 예수님을 만나는 기쁜 일이고, 그 기쁨 속에 구원으로 가는 길이다. 그 기쁨으로 주님께서 우리를  초대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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