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 제2주일 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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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 제2주일 나해 - 광야에 주님의 길을 닦아라.
지난 주일, 문지기처럼 깨어 지키라는 말씀으로 대림절을 시작하였다. 오늘 대림 둘째 주일 말씀은 깨어 기다려야 할 이유를 들려준다. 첫 독서는 나라가 망해 유배당한 유다인들에게 "위로하여라, 나의 백성을 위로하여라. 주 하느님께서 권능을 떨치며 오신다."라는 이사야의 예언이다. 노예로 사는 현실이 아무리 힘들더라도 주님께서 오시리니 기다리라는 위로의 예언이다. 그런데 위로의 말씀 다음에 "광야에 주님의 길을 닦아라. 우리 하느님을 위하여 사막에 길을 곧게 내어라."라는 권고가 이어진다. 주님께서 오실 약속을 믿는다면, 사막에 길을 내듯 힘을 다해 주님께서 오실 준비를 하라는 말씀이다.
유배당한 처지는 아닐지라도 세상살이가 힘들다. 코로나뿐 아니라, 가족이라는 짐, 노화나 질병 등에서 겪는 육체의 한계, 벌어 놓은 돈은 없는데 쓸 일만 많고, 남들과 화목하지 못하는 모난 성격, 덧없이 다가오는 우울감과 허전함 등은 우리 마음을 어둡게 한다. 참으로 위로가 필요한 때다. 드디어 복음에서 우리를 위로하실 기쁜 소식이 선포된다.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란 구절로 마르코복음서가 시작된다. 여기서 "복된 소리"라는 뜻의 "복음(Evangelium)"이란 용어는 본래 로마 황실의 용어로써, '사면령'등 황제가 공지하는 공문 형식을 지칭하였다. 즉 내용이 복된 소식이기에 붙여진 이름이 아니라, 전 세계를 통치하고 구원하는 황제가 공표한 문서를 지칭하기에 '복음'이었다. 그런데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고 표현함으로써, 로마 황제가 아니라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의 선포자라고 선언한다, 이제 세계를 통치하고 구원하는 자가 로마 황제, 혹은 로마 황제로 대변되는 세상의 권력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는 선언을 담고 있는 의미심장한 표현이다.
그 '복음'이 "시작"되었다. 여기서 사용한 "시작"이란 단어는 태초에 하느님께서 세상을 만드시는 창세기에 등장한 단어로 "창조"의 의미를 지닌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세상과 인간이 퇴락하여 노예처럼 굴욕을 당하고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새로운 시작, 새로운 창조가 이루어진다는 선언이다. 더욱이 이전의 로마 황제들은 그저 법령 공포를 통해 통치를 위해 평화를 선포만 하였지 실행하지 않았지만 예수님은 구원의 말씀을 실행하신다. 세상의 주인은 황제가 아니라 하느님이시고, 그 하느님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새로운 창조를 시작하셨다는 참으로 기쁜 소식이 선포된다.
이어서 마르코복음은 첫 독서 이사야서를 인용하여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기록된 대로,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 나타나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라고 전한다. 사막에 길을 내듯 힘을 다해 주님께 오실 길을 닦는 것이 회개라는 말씀이다. 이어서 사람들이 회개하며 죄를 고백하자 요한은 세례를 주었다고 전한다. 회개는 단순히 윤리적 차원에서 죄를 뉘우치는 것을 넘어서서 영성적 차원에서 삶의 정화를 뜻한다. 요한이 주님의 길을 준비하며 마치 물로 씻어내듯 "요르단 강에서, 물로 세례를" 주는 장면은 이 정화를 상징한다.
영성신학에서는 하느님을 만나는 과정을 정화와 조명과 일치의 3단계로 설명한다. 캄캄한 곳에서는 길을 찾을 수 없다. 하느님의 빛으로 조명을 받아야 주님께 가는 길이 열린다. 그 길을 통해 하느님과 일치하면 영원한 행복을 누린다. 그런데 조명이나 일치는 그에 앞서 정화 없이는 불가능하다. 정화의 단계는 하느님을 섬기는 길에 들어선 초심자들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다. 유리병에 흙탕물이 가득 찼는데 거기에 조명을 받아 빛을 담을 수는 없다. 병에 담긴 흙탕물을 먼저 깨끗이 비우고 씻어 버린 연후에나 새로운 하느님의 빛을 받을 수 있다. 그 비움이 정화다. 적지 않은 경우의 신앙인이 영적으로 진보하지 못하고 늘 제자리걸음만 하는 이유는 정화 없이 조명과 일치를 갈망하기 때문이다. 십자가 없는 부활은 없다.
정화의 핵심은 자신을 비우는 것이다. 즉, 정화의 길에서 우리가 버릴 것은 재산이나 소유물 등 물건 자체가 아니라 의존, 갈망, 집착, 소유욕이다(W. 존스턴, 신비신학, 254). 십자가의 성 요한은 정화되지 않은 집착이나 욕망이 우리를 괴롭히고, 어둡게 하고, 눈멀게 하고, 불결하게 하고, 약화시키며, 하느님께 가는 길을 가로막는다고 가르친다. 사람이든 재산이든 명예든 취미든 하느님이 아닌 것에 대한 의존과 집착을 버릴 때 정화가 일어나고 불안을 벗어난다. 불안이나 걱정은 집착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집착과 소유욕을 비운 정화에서 비로소 인간은 자유로워지고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본래 모습을 회복한다. 하느님은 그때 우리에게 오신다. 이러한 정화, 비움이 사막에 길을 내는 작업으로, 하느님께서 오실 길의 준비 작업이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비울 것인가? 우리 각자가 무엇 때문에 불안한지, 왜 걱정하는지, 우리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살펴보면 알게 된다. 자신을 살펴 드러난 모습을 보자. 심술궂고, 옹졸하고, 이기적이고, 경쟁심 많고, 인색하고, 음해하기 좋아하고, 의심 많고, 앙심을 잘 품고, 비판 잘하고, 죄책감 많고, 떳떳하지 못하고, 자만심 강한 모습을 주님 앞에서 내려놓자. 내가 내려놓는 만큼 내가 정화된다. 집착과 욕망을 정화하라는 초대는 어둠에서 빛으로, 걱정에서 기쁨으로 해방되라는 초대다. 세례를 받으며 요르단 강물에 잠기듯 모든 부정을 은총의 물속에 씻어 정화하자. 그렇게 자신을 정화하며 기다리면 주님께서 오신다.
아침에 눈을 뜨며 나의 뜻이 아닌 주님의 섭리가 하루를 이끄시길 기도하는 비움에 주님께서 오신다. 이런저런 사건을 겪으며 마음에서 나의 욕망과 의지가 솟구쳐 올라올 때에 내 뜻을 내려놓고 주님의 손길을 기다릴 때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오신다. 그러한 자기 비움, 정화, 회개의 결과는 참으로 놀랍다. 첫 독서에서 이사야는 포로로 잡혀가 모든 것이 끝나버린 듯한 상황에서 주님께서 "목자처럼 당신의 가축들을 먹이시고, 새끼 양들을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 먹이는 어미 양들을 조심스럽게 이끄신다"라고 예언한다. 둘째 독서에서 베드로 사도는 "하늘은 불길에 싸여 스러지고, 원소들은 불에 타 녹아 버리는" 상황에서도 "의로움이 깃든 새 하늘과 새 땅"이 우리에게 주어질 것이라고 전한다.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복음환호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