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4주일 나해
본문
연중 제4주일 나해- 주님의 말씀을 따라서
인생을 진지하게 살려는 사람이면 누구나 느끼는 갈증은 새로워지고 싶다는 바람일 것이다. 오늘 말씀은 삶의 새로움과 그 능력이 어디서 오는지 일러준다. 한마디로 주님의 말씀을 듣고 말씀에 따라 살 때 삶이 새로워진다.
첫째 독서에서 백성들은 하느님께서 천둥번개 속에서 직접 말씀하시니 무서워서 죽겠다면서 "저희가 주 저희 하느님의 소리를 듣지 않게 하시고 이 큰 불도 보지 않게 해 주십시오."라고 간청한다. 그러자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를 세울 테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야 한다."라고 명하신다. 화답송에서도 "오늘 주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너희 마음을 무디게 하지 마라."라고 권한다. 둘째 독서에서 바오로는 혼인을 예로 들며 주님을 충실하게 섬기려면 어디든 매이지 말고 자유로워지라고 권고한다.
복음은 예수께서 하느님의 말씀을 권위 있게 가르치셨고, 악령을 쫓아내시어 권위를 드러내셨다고 전한다. 여기서 사용한 "권위"라는 용어의 원문은 "엑소시아(exousia)"로, 이는 "존재로부터"라는 의미를 지닌다. 즉 권위는 자기 존재의 근원을 알고 그에 따라 행동할 때 드러나는 아우라와 같은 것이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존재로부터, 존재의 근원인 하느님으로부터' 행동하시고 말씀하셨기에 권위를 지니셨다. 첫 독서에 언급된 하느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들이 구세사에 여럿 등장했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의 말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입에 담아 주시는 말을 전하는 이들이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단순히 담아 주신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가 아니라, 사람이 되신 말씀 자체이셨다. 하느님의 말씀이 사람이 되셨기에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참된 모습을 보여주고 가르치셨다. 그것이 존재 자체에 뿌리를 둔 예수님의 권위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에서 하느님의 권능을 느끼고, 예수님 안에 하느님께서 친히 현존하고 계심을 직감하였다.
더 나아가 예수께서는 그 권위로 악령을 쫓으심으로써 인간이 자신의 본래 모습을 되찾게 하신다. 성서에서 악령은 사람을 속여 생각을 흐리게 하는 기운을 가리킨다. 인간이 악령에 사로잡혀 생각이 흐려지면 자신의 본래 모습을 잃어버린다. 우리도 자신에 대해서 '내가 왜 그랬을까', 혹은 타인에 대해서 '어찌 사람이 저럴 수 있나' 하고 놀랄 때가 있다. 자신이나 남이나 갑자기 다른 사람처럼 돌변한 상황이 악령에 휘둘리고 있는 상태다. 악령에 사로잡히는 일은 특별한 사람에게만 일어나는 특별한 일이 아니다. 자신의 본래 모습을 잃어버리는 순간에 누구에게나 일어난다. 예수께서 악령을 쫓아내신 사건은 정신을 혼탁하게 하는 더러운 기운에서 벗어나서 제정신이 들게 하신 사건이다. 그 과정이 우리가 악령에서 벗어날 길을 일러준다.
예수님께서 더러운 영에게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하고 호통을 치신다. 악령을 쫓으신 이 사건은 율법학자들이 전하던 왜곡된 하느님상을 바로잡으신 사건이었다.(A. 그륀) 당시 율법학자들은 조상 전통에 따라 하느님을 섬겼는데 그 하느님은 왜곡된 하느님이었다. 즉 금전출납부의 수입 지출 맞추듯 선악으로 인간을 평가하는 냉혹한 분, 인색한 계산 끝에 죄인에게 회초리를 들고 벌을 주시는 무서운 분, 높은 데서 사람을 내려다보며 조정하고 단죄하는 분 등으로 하느님을 왜곡시켰다. 이렇게 왜곡된 하느님상은 하느님뿐 아니라 우리 자신의 모습마저 왜곡시킨다. 서로 믿어주고 사랑하는 인격적 관계는 사라지고, 상거래 하듯 이해타산을 따지는 관계로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변질시킨다. 그 결과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믿지 못하게 한다. 더 나아가 걸핏하면 하느님을 들먹이며 조금 더 열심히 산다고 자신들만 구원받았다며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위선자들도 생겨났다.
기쁜 소식을 전하시는 예수님 앞에서 더러운 악령이 저항한다.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왜곡된 하느님상을 가진 이들은 올바른 하느님을 전하시는 예수님을 참을 수 없어 소리를 지르고 저항한다. 진리 앞에서 거짓이 저항하는 모습이고, 빛을 거부하는 어둠의 모습이자, 자비를 거부하는 이기심의 반항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악령을 쫓으신다. 그렇게 예수께서 하느님의 참 모습을 드러내자 사람에게서 악령이 떠난다. 예수님의 권위에 인간성의 어둠과 뒤틀림, 방황과 일탈이 바로잡혀 사람이 제 모습을 되찾게 된다.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라는 주님의 호통은 왜곡된 하느님상을 바로잡으시는 호통이다. 금전출납부를 적어 손익을 따지는 분이 아니라 외아들까지 내주시는 자비로우신 하느님, 사람을 구분하여 죄인들을 배척하고 매질하는 분이 아니라 탕자와 창녀까지 받아주시는 하느님, 심판을 넘어서는 용서의 하느님을 예수님께서 전하셨다. 그것이 주님께서 전하신 기쁜 소식(복음) 이었다. 이 기쁜 소식을 전하며 악령을 쫓으시는 예수님을 보고 사람들은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하고 놀란다. 자비로우신 하느님에 관한 말씀을 듣고 사람들은 마음이 열리고 하느님께로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그것이 사람이 본래 모습을 되찾는 권위였고, 인생을 새롭게 하는 가르침이었다.
"더러운 영"은 지금도 넘쳐난다. 사회나 가정에서도 정신이 나간 듯한 일이 벌어진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예수님을 따른다는 사람들이 방역수칙을 무시하여 이웃에게 위험을 초래하는 모습에서 사회가 술렁인다. 못마땅한 이웃과의 분쟁, 어린아이, 여성, 노동자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폭력과 살인에 이르는 모습이 일상이 되고 말았다. 오늘날 악령의 모습이다. 코로나 바이러스보다 더 치명적인 바이러스 - 이기심, 시기, 미움, 분노, 분열과 같은 악령이 우리의 마음에 침투하지 않았나 살펴보자.
더러운 영은 예수님의 권위로만 쫓아낼 수 있다. 인간성을 파괴시키는 더러운 영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예수님 말씀에서 "권위 있는 새로운 가르침"을 배우라고 복음은 우리를 초대한다. 하느님의 자비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왜곡된 신앙이 아니라. 자비와 은총으로 우리를 껴안으시는 하느님, 사랑이신 하느님에 대한 바른 신앙을 찾으라고 초대한다. 예수께서 존재의 근원인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권위를 지니셨듯, 우리도 우리 존재의 근원을 하느님께 두고 있는 권위를 지닌 존재다. 자신이든 타인이든 본래 하느님을 닮은 존엄한 존재임을 되돌아보며 이를 짓밟는 악령에서 벗어나라고 초대한다. 말씀을 통해 악령에서 벗어나 우리 존재의 본 모습을 되찾고 새로 시작하라고 주님께서 우리를 초대하신다. "오늘 주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너희 마음을 무디게 하지 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