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성탄 대축일 밤 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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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성탄 대축일 밤 미사
오늘 구원자가 태어나셨다
예수께서 태어나신 오늘 밤은 성경에 따르면 한결같이 빛으로 가득 찬 밤이다. 첫 독서에서 "어둠 속을 걷던 백성이 큰 빛을 봅니다. 암흑의 땅에 사는 이들에게 빛이 비칩니다."라고 이사야는 예언한다, 그 예언이 복음에서 "베들레헴 근방의 목자들이 있었다. 주님의 영광이 그 목자들의 둘레를 비추었다."라는 말씀으로 이루어진다.
이 빛은 복음에서 천사가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한다."라고 알린 대로 우리 안에 기쁨을 샘솟게 하는 빛이다. 아기 예수님이 바로 이 빛이시다. "우리에게 한 아기가 태어났고, 우리에게 한 아들이 주어졌습니다."라는 예언이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라는 천사의 아룀으로 성취되었다. 사도 바오로는 이를 두고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은총이 나타났습니다."라고 전한다. 복음을 통해 이 빛에, 구원의 은총에 더 가까이 다가가보자.
예수님께서는 마구간에서 태어나신다. 마구간은 출산에 적합하지 않은 황량한 장소다(베들레헴 주변에서는 바위 동굴을 마구간으로 사용하였다). 거기서 예수님을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뉘었다." 예수님을 뉜 구유는 동물의 여물을 담는 곳이다. 그곳에 하늘에서 내려온 빵, 인간의 참된 양식이 누워 계신다(성 아우구스티노). 동방교회의 이콘들은 아기 예수를 포대기에 꽁꽁 감싼 모습으로 그린다. 이는 시체를 염한 모습으로 죽음을 상징한다. 예수께서 태어나실 때부터 인간을 위한 희생 제물이셨다는 해석이다. 이렇게 구유는 식탁을 암시하며, 거기 누우신 아기 예수님은 당신의 살과 피를 구원의 양식으로 내어 주시는 성체의 신비를 어렴풋이 보여준다.
복음서에는 없지만 교부들은 구유 안의 예수님을 경배하는 소와 나귀가 있었다고 보았다(그래서 성탄 구유를 꾸미며 이 두 짐승을 배치한다). 이러한 해석은 "소도 제 임자를 알고 나귀도 제 주인이 놓아준 구유를 알건만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구나"(이사야 1, 3)라는 말씀에 근거한다. 교부들은 소와 나귀는 인류에게 나타나신 하느님 앞의 유다인과 이방인을 상징한다고 보았다. 한 편 두 짐승을 "두 살아있는 존재들 가운데에서 당신은 알려지게 되실 것입니다."(하바쿡 3, 2)라는 말씀과 관련하여 해석하였다. "두 살아있는 존재"는 계약의 궤를 덮고 있는 하느님의 현존을 알리기도 하고 감추기도 하는 기능을 지닌 두 커룹(대천사, 탈출 25, 18-20)으로 보았다. 이렇듯 구유는 구약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모셨던 계약 궤를 상징하며, 소와 나귀는 계약 궤 위의 두 천사를 상징한다고 해석하였다. 하느님 현존의 징표로 십계명 돌판을 두었던 계약 궤는 이제 징표가 아니라 실제로 나타났다. 계약 궤 대신 구유에, 옛 계명의 돌판 대신 새 계명을 주실 아기 예수께서 탄생하신 것이다.
마리아는 "첫아들을 낳았다"라고 복음은 전한다. 첫아들이란 앞으로 이어질 아들들의 처음을 뜻하지 않는다. 구약 성경에서 첫아들은 하느님께 속한 존재를 지칭한다. "첫아들은 모두 나에게 봉헌하여라"(탈출 13, 1-2); "너희 자식들 가운데 맏아들은 모두 대속해야 한다"(13,13)라는 계명에서 첫아들의 봉헌과 대속은 모두 하느님께 속함을 표현한다. 첫아들이란 말은 예수님이 하느님께 속한 맏물임을 제시하는 표현이다. 같은 맥락에서 로마서에서 바오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많은 형제들 가운데 맏이"(8, 29)라고 부른다. 예수님은 부활이라는 새로운 탄생에서 맏이로 새 인류의 시작을 여신다. 즉 세례를 통해 모든 이가 그분과 함께 죽고 다시 살아난다. 그래서 "모든 피조물의 맏이"(1,15), "죽은 이들 가운데서 맏이"(1, 18)라고 부른다. "그분은 시작이십니다."(1, 18)라는 언급에서 드러나듯, 부활로 시작된 새 창조의 시작이며 마침이신 우주의 참된 맏이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들어오셨다.
"그 고장에는 들에 살면서 밤에도 양 떼를 지키는 목자들이 있었다." 강생의 첫 증언자는 목자들이었다. 예수께서는 목초지로 이루어진 성읍 밖에서 태어나셨다. 편안하게 잠을 자던 성읍 주민들보다 추운 들판에서 밤을 새우던 목자들이 강생 사건에 가까이 있다. 목자는 예수께서 축복해 주실 가난한 이, 단순한 영혼을 가진 이들을 상징한다. 이들이 하느님 사랑의 첫째 자리를 차지한다.
이들에게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라는 천사들의 찬미가 울려 퍼진다.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이란 누구일까? 예수님의 세례 후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루카 3, 22)라는 말씀에서 밝혀지듯, 하느님 마음에 드는 사람은 일차적으로 예수님이다. 더 나아가 이들은 예수님처럼 하느님의 아들과 같은 자세를 지닌 사람,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이다. (J. 라칭거)
세상을 돌아보자. 가정이든 사회든 불안하고 걱정스러운 한숨이 끊이지 않는다. 화난 얼굴로 씩씩거리며 어둡고 추운 세상에서 생존을 위해 몸부림친다. 그러다가 뒤돌아보는 자신의 모습은 허탈하기 그지없다. 그런 우리에게 나타난 "하느님의 은총"은 한 가지도 자기 마음대로 선택할 수 없는 상태로 말구유에 누워 계신 아기 예수다. 한마디로 가난하게 오신 하느님이다. 하느님의 가난하심이 하느님의 사랑법이자 성탄의 신비다. 가장 작고 힘없는 모습으로 오심으로써 의지할 곳 없는 이들의 빛이 되시고, 버려진 마구간에 핏덩어리로 오심으로써 막다른 골목에서 어둠의 심연에 빠진 우리의 캄캄함을 비추신다.
그러기에 주님의 오심은 그 자체로 사랑이다. 내세울 것 없이 부끄러운 우리, 변두리에서 서성이며 한숨 쉬는 우리, 드릴 것 없어 빈손 비비는 우리, 이렇게 무능하고 가난한 우리에게 당신은 연약함과 가난함으로 오신다. 그래서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신다. 그렇다. "하느님의 가난하심, 그것은 내게 그분의 전능하심보다 더 큰 위안을 주십니다. 하느님의 가난하심은 내게 그분의 전지하심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해줍니다. 그것은 내게 그분의 엄위하심보다 더 가까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가난, 바로 여기에 사랑의 가장 높은 단계가 있습니다." (Carlo Carretto)
이 밤,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았다. 우리 상태가 어떻든 간에 우리는 사랑을 받았다. 이것이 아기 예수 앞에서 우리가 기뻐해야 할 이유이다. 우리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우리가 부족하기에 더 사랑하신다. 안팎의 상황이 출구 없는 막다른 골목에. 어둠의 심연에 빠진 듯 보여도,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를 빛으로, 참 기쁨으로, 새로운 삶으로 우리를 이끄신다. 어떻게 이 신비를 기뻐하지 않을 수 있는가?
아기 예수를 보자. 새로운 계약의 궤인 구유에, 커룹(대천사) 대신 온 세상 사람들을 상징하는 소와 나귀의 경배를 받으며, 새로운 시작의 첫아들로 오신 분. 가난과 추위에도 깨어있던 힘든 이들에게 나타나시어, 당신과 같은 이들에게 평화를 주시는 분을 보자. 신구약을 종합하여, 강생의 신비가 모두 담긴 구유에 누워계신 "우리를 위해 태어나신 한 아기"를 경배하자. 추위에 한밤중에 약하고 가난하게 나신 분, 우리와 같아지신 아기 예수께 온 존재를 기울여 고백하자.
'당신은 우리 주 하느님이십니다. 우리의 어둠을 없애고자 어둠 속에 오신 빛, 당신은 우리의 가난을 지고자 가난하심으로 오신 분, 당신은 우리 주 하느님이십니다.' 목자들이 베들레헴으로 가서 아기 예수를 경배하였듯, 우리도 어서 가서 아기 예수를 경배하며 이렇게 고백할 때, 구유에 누워 계신 아기 예수님은 침묵 가운데 우리에게 이렇게 이르실 것이다:
주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벌거벗은 채 태어난 것은 네가 자신을 포기해야 하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내가 가난하게 태어난 것은 네가 나를 유일한 부로 여길 수 있게 하기 위해서.
내가 구유에 태어난 것은 네가 모든 환경이 거룩하다는 것을 배우게 하기 위해서..."
주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약하게 태어난 것은 네가 나를 결코 두려워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내가 사랑으로 태어난 것은 네가 나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내가 밤에 태어난 것은 네가 어떤 상황에서도 빛을 비추는 나를 믿게 하기 위해서.
내가 사람으로 태어난 것은 네가 '하느님'일 수 있게 하기 위해서.
내가 박해 중에 태어난 것은 네가 어려움을 잘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서.
내가 단순하게 태어난 것은 네가 복잡한 것을 버리게 하기 위해서..."
주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내 생명 안에 태어난 것은 너희 모두를 아버지의 집으로 데려가기 위해서." (익명, 성탄 묵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