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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길 회헌 47조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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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5주일 나해

작성자 : 말씀의성모영보수녀회   작성일: 21-02-08 09:57   조회: 6,506회

본문


연중 제5주일 나해 -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

 



사는 게 뭔지 다들 힘들다고 한다. 성경 시대도 마찬가지였나 보다. 첫 독서에서 욥은 "인생은 땅 위에서 고역이요, 날품팔이의 나날"이기에 "누우면 ‘언제나 일어나려나?’ 생각하지만 저녁은 깊어 가고 새벽까지 뒤척거리기만 한다"라고 토로한다. 사람은 누구나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살고 싶지만, 실제로는 하기 싫은 고역을 해야 하는 날품팔이라는 한탄이다. 욥처럼 지금도 전염병과 인간관계, 경제난에 시달리며 질병과 죽음 앞에서 허덕인다. 예수님께서는 이 고역의 인생을 어떻게 대하셨을까?

복음은 예수님께서 보내신 하루의 일상을 전한다.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열병을 앓고 있던 시몬의 장모를 고쳐주신 후, 해가 진 뒤에는 온갖 병자들을 고치고 마귀들을 쫓아내신다. 그리고 새벽에 홀로 기도하신다. 그런데 이렇게 분주한 예수님의 일상은 인생이 고역이라는 욥의 한탄과는 달리 생기가 넘쳐 보인다. 외적인 활동이든 내적인 기도든 예수님의 삶은 하느님 나라를 향한 열정과 인간에 대한 사랑이 넘쳐나는 활기찬 모습이다. 무엇이 고역과 같은 인생을 활기차게 바꾸고, 날품팔이 같은 하루를 새벽부터 기도하며 저녁까지 봉사하는 열정으로 이끌었을까?

빅터 프랭클이라는 유다인 정신과 의사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 유태인 수용소에 감금되었다. 많은 이들이 수용소에서 죽어갔지만 잘 견디는 이들도 있었다. 그런데 전쟁이 끝나기 직전 한꺼번에 많은 수용자들이 죽는 일이 벌어졌다. 유대인들은 1944년 성탄절에 연합군에 의해 해방될 것이라고 믿고 있었는데, 그날 연합군은 오지 않았다. 그러자 그때까지 꿋꿋하게 버티던 유대인들이 갑자기 죽어갔다. 이를 주의 깊게 관찰한 프랭클은 인간은 의미 없는 고통을 견디지 못한다는 정신의학적 결론을 내린다. 아무리 삶이 고역이더라도 의미가 있고, 자신이 쓸모가 있다면 희망을 가지고 버텨낸다. 그러나 의미를 상실하여 자신이 쓸모가 없다는 생각이 들면 작은 어려움도 이겨내지 못한다는 결론이었다.

내 인생이 쓸모가 있다는 희망, 살아갈 의미를 어떻게 발견할 수 있을까? 프랭클은 절망 속에 죽어가는 사람들을 이렇게 설득하였다:

"우리들은 이 수용소에서 죽어갈 것이다. 전염병이든, 과로든, 가스실에서 처형되든 우리 인생은 이 수용소에서 끝날 것이다. 이 상황에서 '죽음까지 며칠 동안의 인생에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라고 생각하면 이왕 죽을 것, 한시라도 빨리 죽는 편이 낫다고 자포자기하게 된다. 그런데 그런 태도는 인생에서 무엇인가를 성취하여 업적을 남겨야만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 결과이다. 그러나 인생은 그렇지 않다. 관점을 전환할 필요가 있다. 삶을 무엇을 성취하고 얻어내야 하는 것으로 대하지 말아라. 내 인생에는 살아갈 의미는 이미 주어졌다. 그 의미를 찾아보자."

프랭클의 제안을 따라 삶의 의미를 찾은 사람들은 생기를 되찾고 꿋꿋이 살아남았다. 이 사실을 바탕으로 의미를 찾아주어 정신 질환을 치료하는 요법(로고테라피-의미요법)이 탄생하였다. 

만일 사람이 노력해서 무엇을 성취해야만 가치가 있는 인생이라면 그 삶은 참으로 허망하다. 누구나 나이를 들수록 육체적으로 쇠약해지고 경제적으로 궁핍해지다가 남의 신세를 지며 죽는다. 성취해야 가치 있는 삶이라면 아무것도 못 하게 된 인생은 허망할 뿐이다. 그러나 의미요법에 의하면 인생의 의미는 능력을 가지고 무엇을 성취하는 데 있지 않다. 비록 능력이 떨어져서 아무것도 할 수 없어도, 살아있는 한 인생은 의미가 있고, 의미가 있는 한 내 삶은 살아갈 가치가 있다.

신앙인의 입장에서 삶을 가치 있게 하는 의미는 무엇일까? 하느님께서 내게 생명과 동시에 존재 의미를 주셨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당신의 모상으로 만드셨기에, 인간은 그 존재 자체로 하느님의 모상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인간이 자신의 능력으로 큰일을 성취하기 때문에 인간을 사랑하시고 구원을 주시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께서는 개인의 능력이나 성취와 무관하게 인간을 그 자체로 사랑하신다. 하느님께서 베푸신 사랑에서 내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발상의 전환, 여기에 신앙의 핵심이 있다. 삶의 의미를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에 둘 때, 신앙인은 어떤 처지든 감사하며 늘 기뻐하며 생기 넘치게 살아간다. 그것이 하느님 모상인 인간의 본래 모습이다. 복음의 예수님이 그 모습을 보여주신다. 예수님께서는 바쁜 삶을 고역으로 여기지 않고 열정에 차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를 하시고 선포하신 말씀을 직접 실천하신다.

자신에게서 하느님으로 발상을 전환한 이에게 인생은 고역이나 날품팔이가 아니라 고맙고 감사한 선물이다. 둘째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당신이 자유인이었지만 복음을 위해서 모든 이의 종이 되었다는 말로 그 행복과 감사를 고백한다.  이 전환점은 어떻게 올까? 인생의 의미를 언제 어디서 발견할까?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이 아닌 행동으로 그 비밀을 일러주신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일에 앞서 외딴곳에서 기도하신다. 기도하는 시간이 하느님께서 내게 주신 삶의 의미를 깨우치는 순간이다. 기도는 자신에게서 하느님께로 발상이 전환되는 지점이다. 내 존재의 의미, 이 고단한 삶의 의미를 찾고 싶다면 기도하라. 기도 속에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과 함께 있어라. 예수님과의 만남에서 주님께서는 우리를 일으키신다.

예수께서는 오늘 시몬의 장모를 “일으키신다.” 여기 사용된 "일으키심(egeiro)"이란 단어의 쓰임이 예사롭지 않다. 예수님은 죽은 소녀를 일으키셨고(마르 5, 41), 더러운 영으로 죽은 듯한 아이를 일으키셨고(9, 27), 죽은 나자로를 일으키셨다(요한 12, 1 ). 사도행전(3,15, 26; 4,10; 10;40; 13,30 등)과 바오로 서간(로마 8,11; 10,9; 1코린 6, 14; 2코린 4,14 등)에서 이 단어는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부활시키셨다는 뜻으로 사용된다. 이렇게 자주 쓰인 "일으키심(egeiro)"이란 용어는 성서신학적으로 주님의 부활에서 드러나듯 새로운 창조에 의한 인격의 완성을 의미한다.

예수께서 시몬의 장모를 일으키셨듯 열병으로 쓰러진 나를 일으키시고, 죽은 나자로를 일으키셨듯 죽음 같은 어둠에서 나를 일으키시고, 끝내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부활시키셨듯 내 삶을 영원으로 이끄신다. 내가 기도할 때 나를 일으키심으로 나라는 인간이 세상을 살아갈 의미를 주신다. 삶의 의미를 찾아 주심으로써 인생은 더 이상 고역이나 날품팔이의 나날이 아니라 감사하며 기쁘고 힘차게 살아갈 선물이 된다. "주님은 마음이 부서진 이를 고치시고, 그들의 상처를 싸매 주시네." (화답송 시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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