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주간 토 -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본문
연중 제1주간 토 -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세관에 앉아 있는 알패오의 아들 레위를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레위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복음)
레위는 세관에 "앉아있었다."
'앉아 있음'은 손가락질 받더라도 그저 잘 먹고 잘 살려고 주저앉은 인생의 상징으로 보인다.
그런데 지나가시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듣고 그는 "일어난다.(ἐγείρω egeiro)"
"일어난다"라는 표현은 성경 원문에 따르면 "부활하다"라는 뜻도 지닌다.
죽음처럼 주저앉은 현실에서, 주님의 부르심을 듣고 응답하여 일어나는 부활이 그려진다.
"저 사람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앉아있던 죄인을 부활시키는 하느님 말씀에 바리사이들이 항의한다.
자신이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신과 다른 분을 보면 두꺼운 인습의 껍질 속으로 숨어든다.
일어나지 못하고 주저 않는 모습이다.
자신이 잘났다고 착각하며 주저 않는 이들을 보시며 예수님이 오늘 이르신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세상에 의인은 없다. 의인을 자처하는 사람이나 예수님에 의해서 의로워진 사람이 있을 뿐이다.
"예수가 이 땅에 등장한 이래로, 예수의 관점에서, 의로움이 무엇이며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이전과 같이 계속 의로움을 추구하며 지속할 수 있는 사람들이 과연 존재할까?
예수가 줄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에 아예 부르지도 않는, 그래서 별로 바꿀 것도 없는 사람들이 존재할까?
백성은 처음부터 예수가 행하는 일을 완전히 새로운 것, 예전에는 결코 존재한 적도 없는 것으로 체험한다.
예수는 율법학자들과 달리 충만한 권위로 가르친다.(마르 1,22)
예수의 가르침은 새롭고 마귀들에 대한 예수의 힘은 그들이 전혀 들어본 적이 없는 것들이다.(1,27)
예수가 행한 일은 그들이 결코 본 적도 없는 것이다.(2,12)
이런 상황에서 예전처럼 그대로 남아 있을 수 있는 것이 과연 있을까?
예수는 기쁜 소식을 가져오는데, 그 소식은 정확히 생각의 변화와 믿음을 요구한다.(1,15)
예수의 등장으로 모든 이에게 새로운 상황이 초래된다.
어떤 이도 단순히 예전 모습 그대로를 인정받지 못한다.
모든 이가 회개하고 믿으라고 부름받는다.
예수는 자신의 사명과 권위로 오직 죄인들만 부르는데, 모두가 회개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율법학자들은 자신들이 특별히 도전받고 있다고 느낀다.
왜냐하면 그들은 스스로 하느님에 대해 하느님의 뜻에 대해 충분히 알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와 그들 사이의 논쟁은 피할 수 없다." (클레멘스 슈톡, 마르코가 전하는 기쁜 소식, 80-81)
[출처] 말씀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