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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이 세상에 정의와 평화를 가져오도록 노력한다.
(말씀의 길 회헌 47조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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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제5주일 다해 -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작성자 : 말씀의성모영보수녀회   작성일: 25-04-08 11:18   조회: 571회

본문

사순 제5주일 다해 -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돌아온 탕자', '자비로운 아버지', 혹은 '두 형제'의 비유라는 제목으로 불리는 예수님의 비유 말씀을 통해, 지난 주일 하느님은 죄인을 벌하는 이 아니라 언제나 죄인을 기다리고 용서하며 사랑하시는 아버지 이심을 묵상하였다. 오늘 복음은 비유가 아니라 실제 사건을 통해, 죄인을 벌하는 하느님이 아닌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예수님이 직접 보여주신다.

 

죄인은 벌을 받아야 한다고 여기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간음하다 현장에서 발각된 여인을 끌고 와서 예수님의 판결을 요구한다. 모세 법은 "간통한 남자와 여자는 사형을 받아야 한다"고 규정했다(레위 20, 10). 율법대로 사형을 선고하면 예수님은 평소 가르치신 용서와 자비와는 상반되는 모순에 빠지고, 죄인을 용서하면 율법 위반으로 고발당하게 될 함정이다.

 

한쪽에는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함정을 파고 노려보는 사람들이, 다른 쪽에는 예수님의 말 한마디에 목숨이 달린 죄인이 서있는 모순 투성이에 사면초가 상황이다. 오늘날 우리 현실로 보인다. 남들의 잘못을 보면 바리사이들처럼 고발하고 험담하기 바쁘고, 자신의 잘못이 들통나면 공격하는 사람들 틈에 숨이 막힐 듯 부끄럽고, 그 와중에 어찌할 바를 몰라 주저앉기도 한다.

 

바리사이들은 왜 여자를 고발했을까? 우리는 왜 타인에 대해 험담할까? 남의 잘못을 지적하고 책망하며 단죄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남이 저지른 잘못을 자신도 범하고 싶은 그림자가 있다고 한다. 간음한 이웃을 입에 거품 물고 고발하는 사람의 마음속에는 간음하고 싶은 그림자가 숨어있다는 말이다. 죄를 지어도 묵인하자는 말이 아니다. 남의 죄를 보고 자신의 어둠을 성찰하지 못하고, 타인의 인격까지 물고 늘어져 모욕과 수치를 주려고 한다면 자신과 타인을 어둠에 빠트릴 수 있다.

 

고발당한 여자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부끄러움 때문에 숨도 못 쉴 지경 아니었을까? 그 상황을 벗어나더라도 수치심 속에서 평생을 비참하게 지낼 처지였으리라. 잘못을 뉘우치는 수치심이 해롭지는 않다. 그러나 잘못에 대한 수치심을 넘어서서, 자신의 존재 자체를 부끄러워하고 부정하는 해악적 수치심은 문제다. '죄를 지은 나'라는 존재는 도무지 개선의 여지가 없기에 이 세상에 존재할 가치가 없다고 느끼는 수치심은 인간이 스스로에게 가하는 폭력이다. 자신이든 타인이든 죄를 지었으니 벌을 받아야 하고, 잘못을 했으니 비참하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용서와 자비, 희망과 사랑의 하느님을 믿지 못하게 된다.

 

고발하는 이들과 죄인 사이에서 예수님은 말없이 "몸을 굽혀 땅에 무엇인가 쓰셨다"고 한다. 시기와 위선 가득한 고발자들, 비인도적이고 몰염치한 세상 앞에서 주님은 침묵하신다. 침묵 속에 깊은 내면에서 하느님을 만나시는 장면으로 다가온다. 침묵을 지키던 예수께서 몸을 일으켜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라고 말씀하신다. 죄인에게 손가락질하기 전에 죄인을 고발하는 자기 자신부터 살펴보라는 말씀이다. 이 말씀으로 예수님께서는 상황을 완전히 뒤엎으신다.

 

자신의 모습을 돌아볼 때 하느님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있겠는가? 말씀을 듣고 나이 많은 사람부터 떠나갔다고 한다. 세상을 오래 살수록 죄가 더 쌓였기 때문일 것이다. 자기 자신이 죄인인데 어떻게 남을 단죄할 것인가? 남이 아닌 자신의 어둠을 보며 자신이야말로 참으로 자비가 필요한 존재임을 깨닫는 데서, 단죄와 고발로 상처받고 상처 입히는 악순환을 넘어서는 길이 열린다. 타인의 잘못만 보고 있는 한, 우리 손의 돌을 내려놓을 수는 없다. 남 흉보는 눈길을 자신에게 돌려 흉보던 그 사람보다 내가 나을 것이 없고, 남에게 돌을 던지려는 자신이 바로 돌 맞을 존재임을 깨달을 때 움켜쥔 두 손에서 돌을 내려놓게 된다.

 

모든 사람이 떠나가고 죄인과 예수님만 남았다. 죄의 문제는 다른 사람이 끼어들지 말고 주님과 당사자가 해결할 사안임을 암시하는 장면이다. 예수께서는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라고 말씀하신다. 죄에 따르는 벌에서 죄인을 해방하시는 말씀이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이 장면을 "비참(miseria)과 자비(misericordia)의 만남"이라고 주석했다. 죄인의 비참함과 하느님의 자비, 죄를 지은 인간의 수치심과 하느님의 자비를 전하는 예수님의 용서가 만나는 장면이다.

 

이 이야기는 범죄를 정당화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죄를 짓거나 죄인을 대하는 우리 자신에 관한 이야기다. 간음만 죄는 아니다. 우리를 비참하게 만드는 모든 것이 죄다. 단죄는 죄의 비참함 속에 인간을 질식시키지만, 용서는 죄로부터 다시 일어나게 한다. 그것이 서로 고발하고 고발당하는 부조리한 세상을 벗어나게 하는 길이다. 예수님이 적선하듯 죄를 눈감아준 것이 아니다. 먼저 자신의 내면을 보게 하시고, 자신 안에 있는 죄를 극복하여 온전히 새로운 삶을 시작하도록 용서하셨다. 용서에 이은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는 말씀은, 죄의 용서라는 선물과 더불어 새롭게 살아야 할 의무도 함께 주시는 선언이다.

 

"예전의 일들을 기억하지 말고, 옛날의 일들을 생각하지 마라. 내가 새 일을 하려 한다." 첫 독서 이사야서의 말씀이다. 지난날의 잘못들을 기억에서 지우고, 흘러간 일에 마음이 묶이지 않으려면 모든 죄가 씻겨져야 한다. 어떻게 죄가 씻겨질까? 여인의 죄와 돌 던지는 고발자들의 죄가 어떻게 씻겨질 수 있을까? 고발자들의 돌을 예수님이 대신 맞으시고 인간의 죄를 대신 지고 죽으신다. "그는 우리의 병고를 메고 갔으며 우리의 고통을 짊어졌다."(이사야 53, 4) 이로써 죄인은 벌받아야 하는 세상에서, 죄인이 용서받고 새로나는 세상으로 변화된다.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상의 수난과 죽으심과 부활로 우리 죄를 씻으신다.

 

죄인을 없애려는 태도나 모든 죄를 덮어두자는 형식적인 사면은 우리 삶을 바꾸지 못한다. 새로운 미래가 열리는 길은 예수님과의 만남에서 비롯된다. 복음 말씀은 오늘도 고발하고 고발당하는 악다구니로 가득한 세상에서, 주님을 만나라는 초대다. 깊은 침묵 후에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으라는 초대다. 여인이 맞을 돌을 대신 맞으며 십자가에서 목숨을 내어 주신 사랑을 보라는 초대다. 그 수난과 죽음에 우리가 참여할 때 부활의 새 생명을 누리게 된다는 초대다. 이를 체험한 바오로는 이렇게 고백한다.

 

"나는 죽음을 겪으시는 그분을 닮아, 그분과 그분 부활의 힘을 알고 그분 고난에 동참하는 법을 알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어떻게든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살아나는 부활에 이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2독서)

[출처] 말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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