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3주간 토 - 희생 제물이 아니라 신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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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제3주간 토 - 희생 제물이 아니라 신의
"정녕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신의다.
번제물이 아니라 하느님을 아는 예지다." (독서)
하느님에 대한 오해는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가로막고 우리를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신의"라는 말씀은
신의 없는 인간이 당신을 희생 제물을 바라는 존재로 오해하지 말라는 호소로 들린다.
신의는 내가 가진 재물이나 지위, 업적이나 평가에 좌우되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의 진솔한 "내"가 "너"를 마주하는 만남, 즉 인격적 관계가 신의의 바탕이다.
"바리사이는 꼿꼿이 서서 혼잣말로 이렇게 기도하였다. ..."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였다." (복음)
자기 자랑만 늘어놓는 "혼잣말"의 기도는 신의를 바탕으로 한 관계와 거리가 멀다.
자기 말만 계속하는 사람을 만나면 얼마나 피곤하던가?
상대방은 안중에 없고 자신만으로 가득 찬 그곳에 신뢰는 사라진다.
기도조차 혼잣말로, 빈말로 치장하는 사람은 결국 신의가 아니라 허위와 권태에 갇히게 된다.
그러나 "너"를 신뢰하며 "가슴을 치며" 실수와 잘못을 솔직히 털어놓는 사람은
단죄 받을 인간이 아니라 이해하고 용서하며 마주하는 벗이 된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하느님 앞에 가슴을 치는 진솔함에 죄인인 인간이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간다.
자신을 제대로 알고 정직하게 하느님을 마주하면 새로운 존재로의 변화가 시작된다.
자비를 청하는 고백에 "하느님을 아는 예지", 하느님 안에서 자신의 본 모습을 아는 예지가 열린다.
하느님이 바라시는 신의로 주님을 만나고, 하느님을 아는 예지로 내 가슴을 칠 때
인간이 의롭게 되어 아버지 집으로 돌아간다는 말씀으로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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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참된 삶은 만남이다.
사람은 나와 너의 관계를 맺음으로써 너와 더불어 현실에 참여한다.
나는 너와 더불어 현실을 나눠 가짐으로 말미암아 현존적 존재가 된다.
관계의 목적은 관계 자체, 곧 '너'와의 접촉이다.
왜냐하면 '너'와의 접촉에 의하여 '너'의 숨결,
곧 영원한 삶의 입김이 우리를 스치기 때문이다." (M. 부버)
[출처] 말씀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