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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이 세상에 정의와 평화를 가져오도록 노력한다.
(말씀의 길 회헌 47조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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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제5주일 나해

작성자 : 말씀의성모영보수녀회   작성일: 21-03-21 14:22   조회: 6,223회

본문


사순 제5주일 나해 - "밀알 하나가 … "



세상살이가 힘들수록 새 세상에 대한 갈망이 커진다. 오늘 말씀은 새 세상에 관한 이야기다. 첫 독서의 배경은 나라가 망하고 백성은 노예로 끌려간 절망적 상황이다. 그 상황에서 하느님께서 "보라, 그날이 온다. 그때에 나는 새 계약을 맺겠다.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라고 새로운 세상을 약속하신다. 그 약속의 실현을 둘째 독서인 히브리서는 이렇게 전한다: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뒤에는 당신께 순종하는 모든 이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예수께서 고난을 통해 새 계약을 완성하고 새로운 세상을 위한 구원의 길을 여셨다는 말씀이다.

복음에서는 새로움을 찾던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뵙고 싶습니다."라고 청한다. 예수님은 이에 동문서답하듯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라는 답변을 주신다. 당신을 만나고 싶고, 당신이 누구인지 알고 싶으면 땅에 떨어져 죽는 밀알을 보라는 말씀이다. 열매를 맺으려고 땅에 묻힌 씨앗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라는 말씀일까? 외형적 모습이 아니라 씨앗의 죽음을 보라는 초대다. 예수님의 죽음을 보라는 말씀이다. 그 고난에 세상이 새로워지는 비밀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밀알이 의식을 가졌다는 가정에서 덴마크의 이외르겐센(Jørgensen)은 밀알이 죽는 과정을 감동적인 단편으로 우리에게 전한다.

밀알은 창고 안에서 완벽하게 행복하였다. 창고는 튼튼하였고, 습기도 없었으며, 함께 있는 친구들도 아주 착해서 다툼도 없었고, 그야말로 완벽하였다. - 이야기를 우리 삶에 비춰보자, 누구나 사업에서의 성공, 편안한 가족, 건강 등 인간적 행복을 추구한다. 그 행복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그것이 다일까? 혹시 창고 속 밀알의 행복은 아닐까?

그 밀알은 아주 경건하였다. 그는 하느님에게 감사한다. "주님, 당신이 제게 주신 것, 저를 제 창고 속에서 이토록 행복할 수 있게 해 주신 것에 감사합니다. 부디 이 행복이 영원히 지속되게 해 주십시오" - 그가 주님에게 감사하는 것은 당연하다. 다만 우려되는 것이 있다. 이 밀알이 혹 존재하지도 않는 하느님에게 말하고 있지는 않을까? 창고 속의 행복을 누리지 못하는 이들, 병고에 실직에 불화에 시달리는 이에게 하느님께서는 어디 계실까? 창고 속 밀알의 작은 행복만을 만드신 하느님, 썩지 않는 밀알을 원하시는 하느님은 가짜고, 우상이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하느님은 고맙게도 존재하지 않는다."(K. Rahner). 충격적인 표현처럼 들리지만 사실 하느님을 자신의 생각 속에 붙잡아놓고 내가 간절히 원하는 것을 이루어 주시는 분으로 여기는데, 그런 하느님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사람이 되신 하느님이신 예수님처럼 사는 것, 즉 우리 일상에서 죽고 썩는 밀알이 되는 것이다.

어느 날, 사람들이 밀알 더미를 수레에 실어 들로 나간다. 들녘은 창고보다도 더 아름답고 상쾌하다. 푸른 하늘, 태양, 꽃들, 나무들 앞에서 밀알은 더욱더 하느님께 감사를 드린다. "주님, 감사하나이다. 이 모든 것이 너무도 아름답습니다!" - 이승의 아름다운 것들에 대하여 하느님에게 감사해야만 한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한 알의 밀알일 뿐이다. 하느님께서는 밀알을 밀알로만 남아 있게, 어떤 소출도 낼 수 없게 창고 속에 붙잡아 두시는 분이 아니다.

사람들이 밀알을 막 갈아 놓은 땅에 묻는다. 밀알은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아무것도 듣지 못한다. 습기가 속까지 파고든다. 피할 수 없는 죽음을 통해 변화되어 무엇인가에 도달해야 하는 존재, 아름다운 이삭이 되어 가는 중의 밀알은 창고를 그리워한다. 죽음의 순간에 밀알은 '하느님께서 계시다면 이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절규할지 모른다. - 안타까운 일이다. 왜냐하면 바로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는 거기에 진정한 하느님, 즉 그로 하여금 밀알의 상태에서 이삭의 상태로 변화하도록 하시는 하느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F. 바리용)

새로운 세상은 땅에 떨어져 죽을 때에만 시작한다. 하느님은 우리를 창고에 보존하는 분이 아니라 땅에 떨어져 썩어서 새로 나고 성장하여 열매를 맺게 하시는 분이시다. 이것이 오늘 밀알 하나의 비유에 담긴 신비이자, 그 말씀을 들려주신 다음 친히 예수님이 가신 길이고, 주님을 따르려는 이들에게 새 세상이 열리는 길이다.

땅에 떨어져 죽는 밀알의 비유를 들으면 이태석 신부를 떠올리게 된다. 그분은 의사로서 사제 서품을 받고 아프리카 톤즈로 갔다. 오랫동안 내전 중이던 수단 원주민들은 상대를 향한 분노와 증오에 쌓인 채, 가난과 질병에 시달리면서 살고 있었다. 악조건에서 척박하게 사는 그들은 특이하게도 가족이 아파도, 누가 죽어도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그 위험한 지역에서 이태석 신부는 나병환자부터 보듬어주고, 병원을 만들고 학교를 세웠다. 아이들을 위해 악기를 가르쳐 밴드를 만들었다. 웃음과 즐거움이 사치로 여겨지던 톤즈 마을은 점점 사람 사는 공간으로 변해갔다.

이태석 신부는 암으로 죽음을 맞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눈물을 보이지 않던 톤즈 사람들, 강인함과 용맹함만을 믿기에 우는 것을 수치로 여기고 가족이 죽어도 울지 않던 사람들이 이태석 신부의 죽음 앞에 눈물을 쏟았다. 세상의 모든 이가 눈물을 흘렸다. 마흔여덟의 나이로 짧은 생을 마쳤지만 사람들의 가슴에 눈물과 감사와 사랑을 심어 사람다운 사람으로 다시 나게 한 신부,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으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보여준 분이다.

물론 우리는 의사도 아니고, 아프리카로 떠날 수도 없다. 그러나 일상 작은 곳에서 밀알처럼 죽을 수 있다. 내 주장만 할 게 아니라 남의 말도 들어주고, 이기려고만 하지 말고 져주고, 혼자 편할 궁리만 하지 말고 남들을 배려할 수 있다. 그 작은 희생이 땅에 떨어져 죽는 밀알의 삶이다. 그저 뒷짐지고 구경만 하면 죽지 않고 한 알 그대로 남는 밀알이다.

죽기가 말처럼 쉽지 않다. 왜 내가 죽어야 하나? 우리의 죽음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죽음을 앞둔 예수님의 심정을 복음은 이렇게 전한다. "이제 제 마음이 산란합니다.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합니까? '아버지, 이때를 벗어나게 해 주십시오.' 하고 말할까요?" 그러나 당신의 사명이 고난의 쓴 잔을 마셔야만 완성됨을 아시기에 "저는 바로 이때를 위하여 온 것입니다." 하시며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십시오." 하고 기도하신다.

죽음 앞에서 예수께서는 아버지를 바라보신다. 땅에 떨어져 죽는 일은 자신의 힘이 아니라 하느님을 바라볼 때 가능하다.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부활시키셨듯, 우리의 희생을 헛되게 하지 않으신다는 믿음이 죽음을 받아들이게 한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밀알의 비유에 이어 이렇게 이르신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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