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2주간 토요일
본문
사순 제2주간 토 -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아버지, 재산 가운데에서 저에게 돌아올 몫을 주십시오."
통상적으로 유산상속은 사후에 이루어진다.
작은 아들은 유산을 청구함으로써 아버지를 죽은 자 취급하는 셈이다.
아버지 앞에서 '내 마음속에 당신은 죽었소, 나에게 아버지는 없소'라고 선언하고 작은 아들은 떠난다.
"그는 돼지들이 먹는 열매 꼬투리로라도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아무도 주지 않았다."
유다인들에게 돼지는 가장 불결한 존재의 상징이었다.
아버지를 떠나 자기 방식대로 살아보려는 노력의 결말은
자신을 상실하고 인간의 품위마저 사라져 모든 것을 잃은 실패였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이러한 고백을 드리려고 아버지께 돌아간 아들은 하려던 말을 다하지 못한다.
아버지는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라는 부분까지만 듣는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라는 말을 듣지 않았다.
아버지에게 아들은 아들일 뿐, 방탕하게 살았든 성실하게 살았든 품팔이꾼이 될 수 없다.
나에게 아버지는 필요 없다고, 죽었다고 대들며 떠난 아들이 돌아온 사실은
떠났던 아들이 아들이 아버지를 살아있는 아버지로 인정하였다는 의미다.
아버지에게 이보다 더 중요하고 반갑고 기쁜 사실은 없다.
그러기에 자신의 성실한 행동과 동생의 방탕한 행동을 비교하는 큰아들의 항의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곧 "행위 중심"의 고발은 "존재 중심"의 아버지에게 애초부터 문제가 되지 못한다.
당신의 아들이라는 "존재성",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가 중요할 뿐이다.
회심은 행위의 선악 판단 이전에, 아버지와의 관계 회복이자 존재성의 회복이다.
그래서 돌아온 탕자를 두고, 돌아오는 모든 이를 두고 아버지는 이렇게 외친다: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아버지는 아들을 찾아 나서지 않으시고 집 밖에 나와 기다리신다.
목을 빼고 기다리시는 아버지의 눈길, 멀리서 뛰어와 꽉 껴안으시는 아버지의 품,
당신의 가락지(품위와 지위의 상징)를 끼워주시며 꼭 붙잡으시는 아버지의 손.
인간의 뿌리, 인간의 존엄성이 거기에 있다.
인간이 궁극적으로 돌아갈 곳이 아버지의 그 품 외에 어디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