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2주일 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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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제2주일 나해 -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사순절은 변화를 위해 광야로 떠나는 시간임을 지난주 묵상하였다. 오늘 말씀은 변화를 가져오는 근원적인 힘이 무엇인지, 그리고 변화된 모습이 얼마나 놀라운지 일러주신다. 첫째 독서는 아브라함이 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드리는 장면이다. 자식을 제물로 바치는 이 끔찍한 사건에 담긴 뜻이 무엇일까? 초세기부터 교부들은 아브라함의 제사를 그리스도의 십자가상 제사를 미리 일러주는 예표로 해석하였다. 아브라함은 외아들을 제물로 바치는 하느님이요, 이사악은 하느님의 외아들 예수님, 이사악이 지고 간 제물을 태울 장작은 예수께서 지고 가신 십자가, 희생제사 장소인 모리아 산은 골고타를 예표한다고 보았다.
그 당시 아브라함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나이 백 살에 얻은 외아들을 내 손으로 바치라고? 차라리 내 목숨을 달라시지' 하는 참담한 상태였으리라. 그러나 아브라함은 말씀에 따라 길을 떠난다. 누구보다 고통스러웠을 아브라함의 심정을 통해서 하느님의 고뇌를 헤아려 본다. 세상 사람들을 위해 외아들의 목숨을 바쳐야 하나? 세상이 그런 가치가 있단 말인가? 세상 사람들이 이 사건의 의미를 알아들을까? 하느님은 아마도 이렇게 말씀하시는 듯하다: '그렇다. 세상 사람들 한 명 한 명을 나는 사랑한다. 나의 이 사랑을 전할 길이 외아들의 희생뿐이라면, 내 아들의 희생으로 사람들이 나의 사랑을 받아들인다면, 기꺼이 희생하자. 외아들을 희생시켜서라도 사람들을 구원해야 한다. 사람들은 그렇게 내게 소중하다.'
아브라함은 제사를 시작한다. 자기를 죽이려고 칼을 뽑아 든 아버지를 바라보는 이사악을 보자.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하는 예수님의 십자가상 절규가 이사악의 눈빛에서 읽힌다. 이 절규, 이 부조리가 인간의 한계다. 세상을 살아가며 '나를 사랑하신다면서 어찌하여 내게 이러한 시련을 주십니까?' 하고 외치는 삶의 한계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경우, 하느님께서 절망의 한계를 넘어서게 하신다. 제사를 멈추고 가시덤불에 뿔이 걸린 숫양을 이사악대신 바치게 하신다. 독서에 생략된 성서 본문에는 제사 지낼 양이 어디 있느냐는 아들 이사악의 질문에 아브라함은 "야훼 이르에(하느님이 마련해 주신다)"라고 대답하였다. 아브라함의 이 믿음을 하느님께서 채워 주셨다.
십자가상 제사의 경우는 상황이 이와 다르다. 아브라함에게는 하느님께서 숫양을 준비해 주셨지만, 하느님께는 숫양을 마련해 주실 존재, 당신보다 더 높은 존재가 없다. 예수님의 목숨을 대신할 그 무엇도 없기에 "아버지 저를 아버지 손에 맡기나이다." 하는 절규와 함께 하느님의 아들 예수께서는 숨을 거두셔야 했다. 인간이 넘어설 수 없는 한계가 목숨이었다면 하느님의 한계는 사랑이었다. 그 무엇도 하느님의 사랑을 가로막지 못했다. 인간을 위해 죽음까지 받아들이신 사랑이 하느님의 한계였다. 주님은 갈등하고 불신하고 죄짓는 인간을 목숨을 바쳐 사랑하셨다.
죽음이 끝이었을까? 정말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다르시다. 하느님의 한계인 사랑은 인간의 한계인 죽음을 넘어선다. 사랑으로 죽음을 넘어선 모습을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변모로 예시한다. 아버지의 뜻에 따르는 희생은 죽음으로 끝나는 헛된 일이 아니고, 오히려 "세상 어떤 마전장이도 그토록 하얗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눈부신 모습으로 변화되는 길임을 보여준다.
이 상황에서 엄청난 충격 속에 베드로는 엉겁결에 초막 셋을 지어, 예수님과 모세, 엘리야를 모시고 싶다고 말한다. 이 청원은 받아들여지지 않고 그 대신 하늘에서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하는 말씀이 들려온다.
예수님의 변화된 모습은 죽음을 넘어서는 사랑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 변모는 보여주기 위한 과시가 아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모습을 황홀하게 바라보며 그곳에 집을 짓고 머무르는 구경꾼이어서는 안 된다. 이제 제자들이 그렇게 변화되어야 한다는 초대가 행간에 담겨있다. 눈부신 변모를 바라만 보고 있지 말고, 우리들도 변모되라고 초대하신다. 그를 위해 제자들이 그랬듯이, 제자들의 말씀을 전해 들은 우리들이 목숨을 내어주는 사랑을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주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아버지의 말씀을 들었던 하느님의 외아들처럼,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던 모세나 엘리야처럼,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하는 아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처럼 변화되라고 주님께서 초대하신다.
예수께서는 산에서 내려오신다. 그러면서 당신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까지" 이 사건을 말하지 말라고 함구령을 내린다. 제자들은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 그 당시에는 몰랐다. 제자들에게 미리 보여 주신 이 변화는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로써만 온전히 완성되기 때문에 부활 전에는 이 신비를 알아들을 수 없었다. 죽음을 넘어서는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부활, 그 변화는 우리가 예수님을 따라 죽고 예수님처럼 다시 살 때 알아듣게 되는 신비다.
이제는 우리 차례이다. 죽음이 기다리는 예루살렘으로 가기 위해 산을 내려오신 예수님을 따라 우리의 일상에서 죽음을 맞이할 각오로 산을 내려오자. 왜 내가 죽어야 하냐는 저항에 죽고, 왜 내 가족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느냐는 원망과 분노에 죽고, 그 속에 담긴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일 때 변화하기 시작한다. 지금의 안락함에만 머무르겠다고 집 짓고 즐기려는 마음에서 죽고, 말씀에 따를 때 변화된다. 내가 옳다는 아집에서 죽고, 상대방의 말을 들으며 그 속에서 상대방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마음을 읽을 때 우리는 변화될 것이다. 그 떼 아들을 번제로 바치는 아브라함의 마음, 외아들을 내어주시는 하느님 마음이 내 마음으로 바뀐다. 이처럼 말씀을 들음으로 우리가 주님을 따라 거룩하게 변모된다.
그러한 변화를 향해 가는 길, 말씀을 들으며 자신을 죽이는 삶이 결코 쉽지는 않다. 생존을 위한 본능의 저항은 우리 힘으로 이겨내기 불가능하다. 이를 체험한 바오로가 격려한다: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신데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당신의 친 아드님마저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어 주신 분께서, 어찌 그 아드님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당신의 아들을 아끼지 않으신 하느님의 사랑이 변화의 힘이자 우리가 그분을 따를 이유이고, 구원의 근거였다. 그 사랑으로 죽음을 넘어서는 변화가 이루어지고 어떤 것도 맞설 수 없는 능력이 주어진다. 변화를 바란다면 우리가 갈 길은 하나뿐이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