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제4주일 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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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제4주일 나해 -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성소 주일이라고도 부르는 착한 목사 주일인 오늘,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착한 목자"라고 소개하시며,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라고 말씀하신다. 오늘 복음에서 "목숨을 내놓는다"라는 표현이 다섯 번이나 반복된다. 이 표현에는 착한 목자의 본성과 예수님께서 죽으신 뜻이 담겨있다. 여기서 "내놓는다"라는 말은 무엇을 제출한다는 뜻보다는 '내려놓는다'라는 의미다. 즉 예수께서 죽음을 앞두고 겉옷을 벗어 "내려놓고" (요한 13,4 참조)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실 때 사용한 용어와 같다. 예수님은 억지로 수난과 죽음의 길을 가신 것이 아니라 목자로서 양들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려놓으신 분이셨다. 같은 맥락에서 부활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 위해 겉옷을 벗어 내려놓으셨다가 그 겉옷을 다시 입으시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A. 바노에). 그러기에 "아버지께서는 내가 목숨을 내놓기 때문에 나를 사랑하신다. 그렇게 하여 나는 목숨을 다시 얻는다."라고 이르신다. 당신 자신을 사랑으로 내놓으신 결과, 아버지로부터 목숨을 다시 얻으신 주님이 우리의 목자라는 말씀이다.
예수님이 양들을 위해 목숨을 내놓으시는 이유가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라는 말씀에 담겨있다. 성경에서 "안다"는 용어는 어떤 대상에 관한 정보를 가졌다는 사실을 넘어서서 그 대상을 받아들인다는 표현이다. 주님은 우리 목자로서 우리를 받아들이는 분이라는 말이다. 우리를 받아들이시는 분을 우리도 받아들일 때, 주님과 우리는 하나가 된다. 죽으시고 부활하신 분이 우리와 하나가 되면 우리도 죽고 부활하게 된다. 주님께서 나를 아시는 목자라는 사실은 우리 삶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까? 주님과 함께 죽고 주님과 함께 부활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 한 신앙인의 고백을 들어보자.
"내가 최초로 성당 문을 두드렸을 때는 이 세상 어디에서도 따뜻한 손길을 만날 수 없는 절망 그 자체에 놓여 있을 때였다. 남편은 중환자실에 누워 20여 일을 혼수상태로 지냈고, 나는 더 이상은 낮아질 수 없는 가난과 초라한 몰골로 중환자실을 지키며 가슴을 떨었다. 이제 막 세 살이 된 막내와 그 언니들은 똑같이 수두를 앓고 있었다. 이런 잔인한 비극 속에서 나로 하여금 성당 문을 열게 한 분은 누구일까. 누가 불렀다고 하면 '오만'이고, 내가 직접 찾아갔다고 하면 '착각'일 것이다. 그즈음의 나는 세상의 질긴 외로움에 몸을 떨고 있었고, 무엇보다도 무서웠다, 그 현실을 극복하기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택할 찰나였다. 누구에게도 내 아픔을 털어놓고 의논할 수가 없었다.
외롭고 무서웠던 그 시절. 나는 성당 문을 처음으로 열고 들어선 그 순간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예수님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성모님이 누구인지도 모르던 그 백지상태의 종교적 상황에서 난생처음으로 성당 문을 열었을 때, 저 벽에 분명한 모습으로 계셨던 예수님의 고상과 눈이 마주쳤을 때, 내 심장은 왜 그렇게 빨리 뛰었으며 가슴은 철렁 내려앉았을까... 벽에 걸린 예수님과 처음으로 눈이 마주쳤을 때, 분명 지금도 기억한다. '덜덜덜' 온몸이 떨렸던 그 순간을... 그리고 나는 들었다. 예수님의 목소리는 지금도 분명하게 들린다. '그래, 다 안다.'
'오! 예수님. 어찌하여 저를 아십니까? 당신은 도대체 누구시기에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이 초라하고 불쌍한 여자의 마음을 다 안다고 하십니까?' 나는 '으악!' 소리치며 울기 시작했고, 내 입에서 처음으로 '주님!'이란 소리가 터져 나왔다. 나를 안다는 그분의 옷자락을 붙들고 통곡하고 싶었다. '아무도 제 마음을 몰라주는데요. 그 누구도 제 마음을 알려고도 하지 않는데요. 이미 제 마음은 저 차가운 얼음 바닥에 떨어져 으깨지고 박살 났는데요. 주님이 안다니요...' 나는 온몸으로 울부짖었다. 나는 울었고 눈물의 홍수 잔치를 이뤘다. 그리고 그분의 말씀 하나 '그래, 다 안다'를 가슴에 비밀처럼 움켜쥐고 그 어려운 시기를 이겨냈다. 넘어질 때도 그 말씀을 부여잡았고, 억울한 일을 당해도 그 말씀을 부둥켜안았다. 죽을 정도로 외로울 때도, 그 말씀 하나를 온몸으로 안고 살았다." (그래 다 안다. 신 달자)
주님께서 나를 다 아시고 나의 모든 처지를 받아들이셨으며, 더 나아가 당신의 죽음을 통하여 이 곤궁한 나를 당신의 아버지 하느님 앞에 당신과 함께 내려놓으셨다. 그리고 아버지는 아들을 부활시켜서 나까지 다시 일으키신다. 이리하여 아들 예수와 아버지 하느님이 서로 알고 받아들이시어 하나가 되신 삼위일체 신비에 내가 들어간다. 예수님을 통해 이 부족한 내가 하느님과 결합되는 놀라운 이 신비가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라는 말씀에 담겨있다.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과 내가 결합되는 이 신비를 베네딕토 16세는 이렇게 설명한다: "인간은 오직 하느님을 바탕으로 자기를 이해하고 자기를 안다. 예수님은 결코 혼자 있지 않으시고 아버지와 함께 있으며 인간에게 늘 열려있다. 예수님은 늘 아버지를 자기 안으로 받아들이고 또 늘 자기를 아버지에게 돌려준다.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생기는 이 자기를 넘어서는 대화는 우리에게 참된 목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참된 목자는 우리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함께 있는 자리로 우리를 이끌고 스스로 생명을 줌으로써 우리를 자유로운 존재로 만든다."(나자렛예수 348-352)
착한 목자인 예수께서는 우리 각자의 힘든 삶과 인간적 한계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을 따르려는 열망을 다 아시고 받아들이신다. 우리의 봉헌에 당신의 목숨을 합쳐서 아버지께 바치신다. 그것이 지금 우리가 봉헌하는 미사의 신비다. 그렇게 아버지께 내려놓음으로 "목숨을 다시 얻은" 주님의 살과 피를, 우리가 받아들여 모심으로 그리스도의 몸과 한 몸을 이룬다. 착한 목자인 주님과 그분의 양인 우리가 서로를 알고 서로 받아들여 일치를 이루는 신비가 그렇게 재현된다.
이를 체험한 베드로 사도는 첫 독서에서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하늘 아래 이(예수님의) 이름밖에 없습니다."라고 선언한다. 둘째 독서에서 요한 사도는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리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라고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