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거룩하신 성체 성혈 대축일 나해
본문
지극히 거룩하신 성체 성혈 대축일 나해 - "이는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
세상은 더불어 살아가게 되어있다. 자식과 부모, 시부모와 며느리, 친구와 이웃, 직장 상사와 부하 등 어떤 형태이든 함께 살아가는 세상이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다. 신앙인은 하느님과 더불어 사는 사람이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당신과 더불어 친교의 삶을 살기를 원하신다. 성체 성혈 대축일인 오늘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말씀은 하느님과 더불어 살아가고 이웃과 더불어 살아갈 길을 성체의 신비 속에서 찾도록 초대한다. 그 모습이 성경 말씀에서 "계약"으로 나타난다.
구약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종살이에서 해방되면 행복할 줄 알았는데 앞길은 첩첩산중이었다. 약속된 땅으로 가는 길인 사막에는 독충이 우글거리고 먹을 것 마실 것 등이 늘 걱정되었다. 그렇다고 종살이하던 이집트로 돌아갈 수도 없고... 이때 미래를 보장해 준 사건이 계약이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지켜 주실 터이니, 백성들은 하느님의 계명을 따라야 한다는 계약을 맺게 된다. 첫 독서에서 들은 대로 이 계약은 피로써 맺었다. 소를 잡아 그 피를 절반은 하느님을 상징하는 제단에 뿌리고 나머지 반은 계약을 약속한 백성에게 뿌렸다. 하느님과 백성이 같은 피로 결속되어 한핏줄처럼 혈맹의 유대를 맺은 상징이었다. 계약을 잘 지키면 하느님께서 한 몸처럼 보호해 주시지만, 계약을 어길 시는 피를 흘리게 되기라는 경고가 담긴 예식이었다. 따라서 만일 계약이 파기되면 속죄의 뜻으로 다시 짐승의 피를 뿌려 죄를 씻어야 했다. 하느님과 더불어 살아갈 길은 구약에서 이처럼 계약의 형태로 나타났다.
실제로 계약은 삶의 모든 분야에 존재한다. 사거리의 신호등은 서로의 안전을 위해 빨간 불에서는 기다리는 의무를, 파란 불은 건너갈 권리를 규정한 계약이다. 가정은 남자와 여자가 사랑과 신의로 함께 살겠다는 계약으로 이루어지고, 직장은 고용주가 임금을 지급하고 직장인은 노동을 약속하는 계약으로 구성된다. 더불어 살기 위해 이런저런 계약을 맺지만 문제는 지키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신호등을 언제나 잘 지켰나? 가정에서 신의를 충실히 지켰나? 이스라엘도 비슷했다. 하느님과 맺은 피의 계약은 번번이 인간 편의 불충실로 파기되어 구원의 약속은 실현이 불가능해 보이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스라엘은 나라가 망하고 식민지 노예로 전락한 끝에, 인간의 약속이 얼마나 부질없고 사람의 노력이 얼마나 허망한지 절감한다. 그래서 옛 계약을 넘어서는 새 계약이 예고되고, 오늘 복음은 새 계약을 맺는 장면이다.
최후 만찬상에서 예수께서는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받아라. 이는 내 몸이다." 또 잔을 들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는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라고 선언하신다.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맺었던 옛 계약이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 새롭게 맺어진다. 하느님과 백성을 하나로 묶어주던 계약의 피는 이제 짐승이 아니라 예수님의 피로 대치된다. 이전에 계약을 지키지 못할 때마다 짐승을 잡아 그 피로 속죄하던 제사는 이제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대치된다. 구약의 계약은 수시로 파기되었고 그때마다 다시 제사를 올려야 했지만, 예수님의 피로 이루어진 새 계약은 단 한 번의 희생으로 완성된다. 인간이 아무리 계약을 파기해도, 참 사람이자 참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통해 끝없이 용서하고 받아주시는 자비가 새 계약의 바탕이었다.
이렇듯 계약을 준수할 수 없었던 인간의 한계와 절망이 예수님의 희생으로 온전히 극복된 제사가 바로 우리가 거행하는 미사다. 이 미사에서 우리가 하느님께 봉헌하는 빵과 포도주는 새 계약의 제물인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된다. 신앙인은 계약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써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고 하느님과 결합한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몸이 새 계약을 완성한다.
그러기에 "그리스도께서는 새 계약의 중재자"(둘째 독서)이시다. 더불어 살기 힘든 세상, 새로워지기 힘든 세상에서 하느님과 함께 살아갈 길이 새 계약인 성체성사 안에 담겨있다. "우리가 이 세상이 좀 더 나아지기를 바란다면 반드시 우리에게 실제로 임하시는 하느님을 기준으로 시작해야 합니다. 성체성사를 통해서 사람들은 새롭게 변화될 수 있습니다." (베네딕토 16세)
성체성사를 통해 새롭게 맺어진 계약 내용은 무엇일까? 계약은 쌍방에게 의무와 권리가 주어지는 약속이다. 새 계약은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의 약속이었다. 예수님 편에서는 당신의 살과 피를 모시는 사람 안에 살아계셔서 인간을 당신처럼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고 당신의 생명을 주시겠다는 약속이다. 인간 편에서는 그리스도의 몸을 모심으로써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과 사람을 사랑하겠다는 약속이다. 즉 예수님의 사랑을 받아들여 사랑으로 응답하는 삶이 새 계약이다. 살과 피를 먹고 마신다는 표현이 섬뜩하게 들리지만 유대인들에게 살은 관계를 의미하고 피는 생명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살과 피인 성체와 성혈을 먹고 마시는 사람은 예수께서 지니셨던 하느님과의 관계와 인간과의 관계를, 예수께서 사셨던 생명을 사는 사람이 된다. 그렇게 그리스도를 모시고 그리스도와 일치한 사람은 또 한 명의 그리스도, 즉 크리스천이 된다.
이처럼 새 계약은 십자가상에서 피를 흘리심으로 완성되었고, 미사를 통해 재현된다. 이 미사에서 예수님은 우리 삶이 변화하라고 초대하신다. 빵과 포도주가 예수님의 몸과 피로 변하여 세상에 생명을 주듯, 우리도 자기 이익만 찾는 삶에서 자신을 내어 주어 새로운 삶을 살라는 초대다. 예수 그리스도처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며, 벗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삶, 사랑하고, 나누고, 희생하고, 격려하고, 위로하며 희망으로 부활하는 삶이 우리가 이행할 사랑의 계약이다.
내어주는 사랑의 힘이 세상의 모든 어려움을 넘어서게 한다. 새 계약의 제물로 자신을 내어주신 예수께서 죽음을 넘어서서 부활하셨듯, 우리도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의 힘으로 세상 어려움을 넘어서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된다. 새 계약을 실행할 이유와 그 결과에 대해 주님 친히 이렇게 이르신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리라." (요한 6, 51. 복음환호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