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6주일 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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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6주일 나해 -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세상 사람들은 누구나 평화롭게 살기를 바라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평화를 누리지 못하고 고생하는 이유 중 지도자를 잘못 만난 경우도 많다. 첫 독서에서 예레미야 예언자는 "불행하여라, 내 목장의 양 떼를 파멸시키고 흩어 버린 목자들! 너희는 내 양 떼를 흩어 버리고 몰아냈으며 그들을 보살피지 않았다."라고 전한다. 여기서 목자들이란 하느님을 대신하여 이스라엘을 돌보라고 세워 준 왕 들이다. 그 왕들이 정의와 공정을 바라시는 하느님을 망각하고 불의하고 불공정하게 나라를 다스린 결과, 나라는 망하고 백성은 고향에서 쫓겨나 타국 땅에 끌려가 종살이를 하게 되었다.
예레미야는 이 상황에서 하느님께서 목자 노릇을 제대로 수행할 왕을 다시 세워주겠다고 예언한다. "그날"이 오면, 사람들이 유배에서 돌아와 "고향에서 살게 된다"는 희망찬 약속이다. 실제로 나라가 망하고 유배길에 올랐던 유다인들은 60년 후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목자 노릇을 할 왕은 나타나지 않았고 식민지에는 공정보다는 차별이, 정의보다는 불의가 늘어가며 구원은 요원하게 되었다. 과연 예레미야가 예언한 구원의 날인 "그날"은 언제 오고, 공정과 정의를 이루는 목자는 누구일까?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일상을 전한다. 제자들이 사람들을 돌보느라 음식을 먹을 겨를도 없이 바쁘자,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외딴곳으로 가서" 쉬려고 하셨다. 그런데 이미 그곳에 와서 기다리는 사람들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라고 복음은 전한다. 잘못된 목자도 문제이지만, 목자가 없는 것도 큰 문제다. 목자가 없으면 양들은 길을 잃고, 불안 속에 흩어지며, 들짐승의 위험에 노출된다. 목자 없는 양들은 누구일까? 살아갈 방향을 잃은 채 마음의 양식과 힘과 위로와 용기를 얻지 못하고, 온갖 위험에 노출된 이들 아닐까?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가엾게 보시고 목자가 되어 주신다.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목자가 되셨을까? 바오로 사도는 둘째 독서에서 이렇게 전한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몸으로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시고 이 둘을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셨습니다. 그렇게 하여 당신 안에서 두 인간을 하나의 새 인간으로 창조하시어 평화를 이룩하시고, 십자가를 통하여 양쪽을 한 몸 안에서 하느님과 화해시키시어, 그 적개심을 당신 안에서 없애셨습니다." 우리의 목자이신 예수님은 정치 체제를 변혁시켜 강한 나라를 만드신 목자가 아니고, 경제제도를 개선하여 부자를 만들어 주신 목자도 아니다. 그분께서는 원수 되어 갈라졌던 사람들을 당신 가슴에 모두 끌어안아, 적개심의 울타리를 당신의 희생으로 허무시어, 우리를 하나로 일치시키신 목자다.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모든 장벽을 없애시고 원수 같던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 하느님께 나아가게 하신 참 목자 시다. 그러기에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때의 실화다: 미국의 한 주교가 로마에서 교황님을 만나러 가다가 시내의 한 골목에서 구걸을 하고 있는 거지를 만났다 그 거지는 주교가 로마에 유학하던 신학생 때 함께 공부하고 서품을 받은 동료였는데 알콜중독에 노숙자가 된 정직상태의 사제였다. 주교가 거지 사제에게 다가가자 그는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황급히 자리를 떴다. 미국 주교는 교황님을 뵙는 자리에서 거지 사제를 만난 일을 말씀드렸다. 그러자 교황님은 "주교님, 죄송하지만 한 번 더 그곳에 가셔서 그 사제를 제게로 모시고 와 주십시오."라고 부탁했다. 이튿날 거지 신부를 찾아간 주교는 자꾸만 피하려는 친구 사제에게 통사정을 해서 간신히 교황께 데리고 왔다. 교황님은 거지 사제를 보자 무릎을 꿇으며 "신부님에게 고해성사를 청합니다."라며 머리를 숙였다. 당황한 사제는 "저는 사제로서의 모든 권한을 잃어버린 지 오래입니다. 따라서 고해성사를 드릴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교황님은 "제가 로마 주교로서 지금 이 자리에서 신부님께 사제로서의 모든 권한을 드립니다. 제게 고해성사를 주십시오." 꿇어앉은 교황에게 고해성사를 주는 거지 사제의 눈에서 쉬지 않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교황의 고해성사가 끝나자 이번에는 거지 사제가 교황님 앞에 꿇어 고해성사를 청했다. 사제의 고해성사가 끝나자 교황님은 그가 구걸하며 살던 동네의 이름을 묻고 그 사제를 그 동네의 고해신부로 임명했다. 그는 거리의 부랑아들과 거지들의 고해신부로서, 누구보다도 노숙하는 사람과 떠도는 사람들의 심정을 잘 아는 사제로서 충실히 살았다.
성인 품에 오르신 요한 바오로 2세는 타락한 사제를 목자로서 양 떼를 측은히 여기시는 예수님의 눈길로 보았고, 그 사제는 교황님의 눈길에서 자신을 가엾이 보시는 그리스도를 만났다. 이렇게 서로가 서로 안에서 그리스도를 체험하였다. 그리스도가 두 분 사이의 담을 허물고 하나로 묶어 참 평화를 주셨던 것이다. 더 나아가 그 사제는 교황님과의 만남에서 발견한 그리스도의 눈길, 측은히 여기는 목자의 눈길을 가지고 자신이 구걸하던 거리의 목자 없는 양들을 찾아 나섰다.
우리 삶에서 겉으로 보기에는 한심한 자녀, 노쇠한 부모, 게으른 남편, 속 좁은 아내, 부족한 동료나 이웃이지만, 예수님의 눈으로 보면 가엾고 불쌍한 사람이다. 그리스도의 눈으로 그들에게 먼저 손을 내밀면 상대방도 거기서 우리를 측은히 보시는 그리스도의 눈길을 만난다. 그러면 서로를 차별하고 갈라지게 했던 담이 무너지고 적개심이 없어져 하나가 되어 평화를 누리게 된다. 서로가 서로에게 그리스도가 되면 평화가 온다.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그날"은 그렇게 다가온다.
사는 게 쉽지 않다. 더위에 전염병에 모두 지쳤다. 오늘도 예수께서는 지친 우리들에게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라고 말씀하신다. "외딴곳"이 어딜까? 그곳은 나를 측은히 바라보시는 예수님을 만나는 곳이자, 예수님이 그렇게 보시는 나 자신을 발견하는 곳이다.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지 발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나를 가엾이 여기시는 예수님을 만나는 곳이다. 그렇게 만난 그리스도의 눈길을 가슴에 담고 그리스도의 눈길로 나를 힘들게 하는 가족과 세상살이에 지친 이웃을 다시 보는 곳이다. 자기 생각만 하던 울타리를 허물고 서로를 받아들여 하나가 되는 곳이 주님께서 이르신 "외딴곳"이다. 외딴곳으로 가자. 참 목자이신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화를 누리기 위해 "외딴곳"으로 가서 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