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9주일 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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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9주일 나해 - 나는 생명의 빵이다.
복음에서는 빵에 관한 말씀이 3주째 이어진다. 지지난 주에는 물고기 두 마리와 빵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신 사건을 들으며 예수님 손을 거치는 삶, 감사드림으로 변화하는 삶을 묵상했다. 지난 주에는 빵을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란 말씀을 통하여 삶의 선물이 누구에게서 왔는지 묵상하였다. 이번 주일은 예수님 자신이 바로 생명의 빵이란 말씀을 듣는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라고 오늘 예수님은 선언하신다. 예수님이 빵이라는 말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다. 그러기에 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수근거리기 시작한다. 글자 그대로만 보면 말이 안 되는 말씀이다. 글자가 아닌 뜻을 보아야 하고, 그 뜻은 물리적 차원이 아니라 신앙 차원에서 드러난다. 말씀을 헤아릴 열쇠가 '생명'이라는 단어에 담겨있다. 성경의 그리스어에는 '생명'을 지칭하는 용어가 몇 가지 있는데 그 의미가 서로 다르다. 먼저 '비오스(bios)'는 피조물의 자연적 생명, 물리적 생명을 가리킨다(이 단어에서 현대의 생명공학, 생명 과학 등을 뜻하는 '바이오'라는 단어가 유래한다). 다른 단어로 '프쉬게(psyche)'는 심리적 생명을 의미한다(여기서 'psychology 심리학'이라는 단어가 파생했다).
그런데 복음 말씀 "생명의 빵"에 사용한 단어 "생명"은 '조에(zoe)'로서 요한복음에서 52회 등장하는 중요한 개념이다. 이 단어 "조에(생명)"는 생명의 원리, 살아있음, 삶의 질, 생명의 충만, 살아갈 이유, 약동하는 생명의 기쁨 등을 나타내는 말이다. 즉 예수님이 말씀하신 생물학적으로 무병장수하게 하는 불로초가 아니고, 심리적인 마음의 양식도 아니다. "생명의 빵"은 살아갈 이유가 분명하기에 기쁨에 넘쳐 생생하게 약동하는 삶을 살게 하는 원동력을 의미한다.
"영원히 살 것"이라는 말씀에서 '영원'이란 표현 역시 물리적 언어가 아니라 신앙의 언어다. 즉 수명이 천년만년 이어진다는 뜻이 아니다. 하느님은 영원하신 분이다. 우리가 강생하신 하느님인 예수님을 모심으로 예수님과 하나가 되면,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고 그분의 영원하심에도 참여한다. 그것이 영원한 삶이다. 우리를 영원히 살게 하신다는 말씀은 살아갈 이유를 주시어 충만한 삶을 살게 하시는 주님을 받아들이면, 주님은 우리를 영원하신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시키신다는 놀라운 소식이다.
정신질환으로 병원을 찾아오는 환자들이 호소하는 가장 잦은 증상은 "죽은 것과 다름없는 상태"라고 한다(C. G. Jung). 그 증세는 자신의 내면이 죽었다는 느낌, 삶의 방향을 상실했다는 느낌으로 나타난다. 우리도 기쁨도 없고 보람도 없고 감동도 없이 그저 하루하루 피곤한 채 죽지 못해 살고, 살아도 산 것 같지 않은, 죽은 것과 다름없는 때가 있다. 예수님이 생명의 빵이라는 말씀은 생명력을 상실하고 죽은 것처럼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상황에 놓인 인간을 되살리실 분이 당신이라는 말씀이다.
예수님이 생명의 빵이심을 체험한 실화를 소개한다. 베트남 나트랑교구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구엔 반 투안 주교는 베트남이 공산화되자 체포되었다. 이후 13년간 감옥에서 공산 정권의 집요한 배교 회유를 당했고, 그중 9년을 독방에 수감되었다. 그분은 "모든 것이 부족한 감옥에서 매 순간 생각의 정점에 있었던 것은 생명의 빵인 성체성사였습니다."라고 고백한다. 투안 주교는 간수가 잠든 한밤중에 담요를 뒤집어쓰고, 손전등 안에 숨겨둔 제병과 위장약으로 받은 포도주 세 방울을 손바닥에 놓고 미사를 봉헌했다. 차차 수감 중인 신자들이 미사에 참여하여, 숨소리를 죽여가며 모기장 사이로 손을 넣어 성체를 받아 모셨다. 감옥에서 교우들이 주님의 몸을 생명의 양식으로 모시게 된 결과를 투안 주교는 이렇게 회상했다: "감옥의 어둠은 부활의 빛으로 바뀌었습니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가운데 복음의 씨앗은 싹을 틔웠습니다." 감옥은 교리교육장이 되었고 수감자들은 세례를 받기 시작하였다. 성체는 하느님과 인간을 이어 주었다. 어떠한 절망 상황에서도 성체를 통해서 희망을 찾고 성체 안에서 살아갈 이유를 발견하였던 것이다. 그렇게 예수님의 몸인 성체는 생명의 빵으로 드러났다.
언제 끌려나가서 총살을 당할지 모르는 위기 상황에서 어떻게 성체가 생명럭을 주었는지 이렇게 고백하신다: "한때 저는 금으로 된 성반과 성작으로 미사를 봉헌하였으나 이제 당신의 성혈은 제 손바닥에 놓여 있습니다. 한때 저는 감실에 모신 당신을 조배했습니다만 이제 저는 당신을 제 호주머니 속에 밤낮으로 지니고 다닙니다. 한때 저는 수천 명의 신자들 앞에서 미사를 봉헌했습니다만 이제 밤의 암흑 속에서 모기장 밑으로 성체를 전합니다. 매트 위에서 곰팡이가 자라는 감방, 여기에서 저는 행복합니다. 왜냐하면 당신께서 저와 함께 계시고 당신께서 제가 이곳에서 당신과 함께 생활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죽음의 감옥에서도 예수님은 생명의 빵으로 오시어 생동감 넘치게 살게 하셨다. 생명의 빵인 성체가 믿음을 지키고 희망을 키우며 사랑을 나누는 양식임을 체험한 투안 주교는 "성체성사 없이는 하느님의 생명을 유지할 수 없었다."라고 증언했다.
투안 주교는 자신의 하느님 체험의 발전 과정을 이렇게 전한다: "나 자신을 포함하여 모든 죄수들은 교도소에서 풀려날 날을 학수고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생명의 빵임을 체험한 이후, 나는 작정했습니다. ‘나는 기다리지 않으리라. 현재의 순간을 사랑으로 가득 채우면서 살아보리라.’고 말입니다." 내 삶을 과거에 묶어 두거나 미래로 유보하지 말고, 지금 여기서 예수님의 사랑으로 내 삶을 채우면, 감옥이든 성당이든 하느님의 생명을 누리게 된다는 고백이다. 투안 주교는 이후 석방되어 추기경에 서임되어 로마에서 활동하다가 2002년 선종하셨으며 현재 시복 절차가 진행 중이다.
첫 독서에 등장하는 사막처럼 배고프고 목마른 세상이다. 세상은 "죽은 것과 다름없는 삶"을 강요하며, 현실은 감옥처럼 우리 삶을 옭아맨다. 이 상황에서 어떤 힘으로 살아가야 할까? 주님께서 생명의 빵이시다. 지금 여기서 주님께서 생명의 빵임을 고백하고 주님의 사랑으로 내 삶을 채우면, "죽은 것과 다름없는 삶"은 영혼을 되찾아 생동감이 넘치게 되고, 하느님과 하나가 되어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게 된다. 예수님은 오늘 분명히 이르신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