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회원가입  |   로그인  |   오시는 길
우리는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이 세상에 정의와 평화를 가져오도록 노력한다.
(말씀의 길 회헌 47조 참조)
말씀의 숲
영성의 향기 말씀의 향기 수도원 풍경 세상.교회의 풍경 기도자리
말씀의 향기

주님 수난 성금요일 - 보라 십자 나무

작성자 : 말씀의성모영보수녀회   작성일: 25-04-19 16:16   조회: 581회

본문

주님 수난 성금요일 - 보라 십자 나무

 

하느님의 아들이 인간의 죄를 짊어지고 돌아가신 참담한 날이다. 주님의 수난과 죽으심이 우리를 위해, 나를 위해 벌어졌다는 사실이 오늘 듣는 성경 말씀을 관통한다. 첫 독서는 이사야가 전한 주님의 종의 넷째 노래로, 그는 "사람들에게 멸시받고 배척당한 고통의 사람, 병고에 익숙한" 사람이다. 왜 하느님의 종이 그런 수모를 당했을까? "그는 우리의 병고를 메고 갔으며 우리의 고통을 짊어졌다."라고 일러준다. 우리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고통을 겪었다는 말씀이다. 둘째 독서인 히브리서는 예수님이 죽음을 앞두고 "큰 소리로 부르짖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다." 그래서 "우리의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다"라고 전한다. 우리의 구원을, 나의 구원을 위해 예수님이 눈물로 탄원하며 돌아가셨다는 말씀이다. 복음은 예수님의 수난 여정을 생생히 전한다.

 

수난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서 버림받고, 유다에게 배신당했으며, 베드로에게 부인당하고, 수석 사제들에게 불경죄로 고발당하고, 군중에게 무시당하고, 병사들에게 매질 당하고, 십자가에 다가온 사람들에게 조롱당했으며, 어둠에 둘러싸여 하느님에게도 버림을 받은 듯한"(R. 브라운) 모습으로 돌아가신다. 재판 과정에서 아무런 죄목을 발견하지 못한 빌라도는 매질과 가시관으로 모욕을 준 후, 처참한 몰골의 예수님을 군중에게 보여주며 ", 이 사람이오."(요한 19, 5: Ecce Homo! 이 사람을 보라!) 하고 말한다. 빌라도의 이 말에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신 사건의 가장 깊은 뜻이 담겨있다(R. 불트만).

 

"이 사람"은 누구인가? 상처 입고, 멸시당하며, 고통받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분이 "말씀이 사람이 되신" 분이다(요한 1,14). "이 사람"이 구원을 위해 세상에 오신 하느님이시다. 하느님은 힘세고 권위 있고 강력한 능력으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셨다. 모함과 거짓의 모든 죄를 뒤집어쓴 사람으로, 매질로 피를 흘리며 가시관으로 모욕을 당하는 사람으로 드러난 예수님이 하느님이셨다. 승리가 아닌 패배, 강력함이 아닌 나약함, 쟁취가 아닌 희생으로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이 하느님의 구원 방법이었다.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예수님에게는 오직 하느님만이 중요했다. 당신이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 하느님의 다스림을 위해 죽음을 받아들이신다. "예수님이 드러내신 하느님과 그 나라는 힘없는 가운데 하느님의 다스림이, 가난 가운데 부요함이, 버림받은 가운데 사랑이, 공허 가운데 충만함이, 죽음 가운데 생명이 실현된 모습이다."(W. 카스퍼)

 

'이 사람을 보라!'는 선언은 하느님의 모습뿐 아니라 하느님이 지으신 인간의 참모습도 드러낸다. 예수님의 겉모습이 아무리 고난과 상처로 얼룩졌더라도, 본성은 변함없이 참 인간이자 참 하느님이시다. 그처럼 우리가 아무리 많은 고난과 상처를 입었더라도 하느님을 닮은 존엄성이 우리에게서 없어지지 않는다. 하느님의 자비와 인간의 존엄성은 예수님의 수난에서 이렇게 드러난다. 수난을 받으시는 예수님은 고난과 상처 속에 사는 인간에게 희망의 상징이 된다(베네딕토 16).

 

수난당하시는 주님을 보고도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는 대중의 외침에 빌라도는 "예수님을 넘겨준다." 주님의 수난은 인간의 존엄성과 더불어, 인간과 세상의 이면에 있는 무기력과 비겁과 불의를 드러낸다. 결국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십자가상의 예수님은 어떤 분인가? 이 기막힌 몰골의 예수님은 정말 누구이신가? 십자가상의 예수님은 그분을 따르려는 이들에게 누구인가? 죽음 앞에서 남긴 그분의 말씀을 다시 듣는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어머니에게 요한을 가리키며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라고, 요한에게는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라고 이르신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주실 수 있는 것을 다 주신다. 당신을 고발하고, 배반하고, 부인하고, 모욕을 주는 인간들을 위해 당신의 살과 피를 주셨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당신에게 가장 소중한 어머니를 넘겨주시고, 어머니 마리아에게 우리를 자녀로 맡기신다. 끝까지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모습이다.

 

예수님의 이 모든 수난 행적은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시려"는 행적이었다고 복음은 전한다. 당신의 목숨을 내주시고 어머니마저 건네주시고, "목마르다."고 호소하신 갈증은 성경 말씀, 곧 하느님 아버지의 말씀을 이루시려는 갈증이었다. 우리의 목마름이 성경 말씀을 이루려는 목마름, 내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찾으려는 목마름으로 이어질 때 하느님의 뜻이 예수님에게 이루어졌듯 우리 안에서도 이루어질 것이다.

 

예수님은 "다 이루어졌다."라고 외치며 돌아가신다. 무엇을 다 이루셨을까? 예수님은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 (요한 13,3). 당신이 다 이루신 것은 인간을 끝까지 사랑하시던 그 사랑이었다(베네딕토 16). 결국 예수님이 "다 이루신" 일은 하느님 아버지의 뜻인 우리의 구원이었다. 이제 초라함과 무기력, 불확실함 속에서 병들고 늙고 죽어가야 하는 인간 한계가 극복되는 길, 그가 누구든 모든 인간의 삶이 의미를 지니고 사람답게 완성되는 길이 열렸다. 예수님의 죽음은 하느님의 인간 사랑이었다.

 

​​숨을 거두신 예수님의 창에 찔린 옆구리에서 피와 물이 흘러나온 사실을 전하며 복음서는 "그들은 자기들이 찌른 이를 바라볼 것이다."라고 전한다. 자기들이 찌른 이를 바라보듯,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바라보라는 초대이다. "바라봄을 통하여 인간은 통찰에 이른다. 그리고 통찰을 통하여 인간의 삶은 변하고 쇄신된다. 바라봄을 통하여 사람은 바라보는 것과 하나가 된다. 우리가 상처 입은 분을 바라보아야 할 이유는 예수님의 상처에서 우리는 구원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상처 입은 예수님에게서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본다. 예수님의 거룩한 상처를 통해 우리는 볼 수 없는 하느님의 사랑을 바라보고 묵상하고 마음에 새기게 된다. 예수님을 바라보는 사람은 예수님처럼 영광스럽게 변화할 것이다."(A. 그륀)

 

​​"보라 십자 나무. 여기 세상 구원이 달렸네." 우리의 병고, 나약함, 비겁함, 아픔과 죄악이 저 십자가에 달렸다. 십자가를 경배하며 나를 위해 "다 이루신" 주님의 사랑을 바라보자. 십자가에 달리신 분을 통해서 구원이 온다. 십자가를 보며 하느님의 사랑을 마주할 때, 예수님을 부활시키신 하느님은 우리도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시키신다. 그래서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가 사는"(갈라 2, 20) 새 삶이 시작될 것이다.

 

"보라 십자 나무. 여기 세상 구원이 달렸네. 모두 와서 경배하세."

 

[출처] 말씀에

해뜨는 마을 l 영보자애원 l 영보 정신요양원 l 천안노인종합복지관
교황청 l 바티칸 뉴스 lCBCK 한국천주교주교회의
한국 천주교 여자수도회 l 한국 천주교 주소록 l 수원교구
우. 13827 경기 과천시 문원청계길 56 말씀의성모영보수녀회
56 MunwonCheonggyegill Gwachon-si Gyeonggi-do TEL : 02-502-3166   FAX : 02-502-8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