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수난 성지주일 다해 - 누가 예수님을 죽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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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수난 성지주일 다해 - 누가 예수님을 죽였나?
오늘은 성주간이 시작되는 성지주일이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기념하고 재현하는 이 성주간은 파스카의 신비, 구원의 신비, 삶과 죽음의 신비로 가득 차 있다. 신비는 체험해야 깨닫는다. 수난의 신비를 체험하기 위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를 함께 봉독한다. 그 등장인물 가운데 나를 발견하고 체험할 때 수난의 신비에 내가 참여하게 된다. 예수님의 수난기에서 나는 누구일까?
예수님을 고발한 사람들은 누구인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 성지 가지를 손에 들고 예수님을 환영하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예수를 죽이라고 소리친다. 왜 이렇게 모순된 모습을 보일까? 군중들은 자신들의 목적 때문에 예수님을 따랐다. 그들은 빵을 원했고, 병이 낫기를 원했고, 편안하게 살기를 바라며 예수님을 따랐다. 처음에 그 기대를 채워주는 듯 보이던 예수님은 날이 갈수록 기대에 어긋났다. 사람들은 무지갯빛 인생을 원했는데, 주님은 희생과 용서를 요구하셨다.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덕을 보려고 했는데, 예수님은 덕을 베풀라고 하셨다. 자신들의 기대가 깨어지자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이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친다.
쉬는 교우들을 만나 왜 쉬냐고 물으면, 성당에 다녀도 달라지는 게 없더라고 말한다. 사업의 번창이든지, 건강의 회복이든지, 가정의 평화 등을 기대하고 성당에 갔는데 그 기대가 채워지지 않았다고 한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되어야 하느님이든 신앙이든 의미가 있다고 여긴 결과다. 사람들은 왜 다투는가? 일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고 화를 내고, 상대방이 내가 원하는 방법대로 따라주지 않는다고 미워하고 원망하고 험담하지 않는가? 우리가 자신이 만들어 놓은 잣대로 타인에게 나의 기대치를 투사하고, 그 결과에 따라 사람들을 평가하고 단죄한다면, 예수님을 따르다가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는 군중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예수님을 때리고 조롱한 사람들은 누구인가? 로마 군사들과 헤로데의 종들이었다. 천대받던 사람들, 모욕을 당하는데 익숙해진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이 자기보다 못한 사람 하나를 손아귀에 넣자, 인간의 비참한 본성이 드러난다. 자기보다 약한 사람에게 그동안 강자에게 무시당했던 울분을 쏟아 놓는다. 그들은 느낀 대로 즉흥적인 의사 표시를 한다. 그들의 인생은 쓰라리고 무겁기만 할 뿐 희망도, 기쁨도 없었다. 그렇게 살아온 고통과 괴로움이, 수난 현장에서 약자인 예수님을 향해 터져 나온 것이다. 강한 사람들에게서 무시당하며 괴로워했던 우리는 나보다 약한 사람들, 가난하고 힘없고 버려진 이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이들에게 예수님은 어떤 반응을 보이시는가? 침묵 속에 그들의 천박함과 잔학함에 당신을 내어 맡기신다. 한없이 나약한 모습이다. 어째서 그토록 나약하실까? 하느님은 강함이 아니라 약하심을 통해 구원을 이루시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다. 하느님이 나약한 분으로 드러난다는 사실을 우리로서는 이해하기 힘들다. 그러나 하느님의 능력은 약함 가운데 드러나는 것이 구원의 역사 전체를 관통하는 진리다. 아흔아홉 살까지 아들이 없던 아브라함을 민족들의 아버지로 삼으시고, 종으로 팔려간 요셉을 통해 백성을 살리시고, 종살이하던 백성을 통해 인류 구원을 시작하셨다. 예수님의 족보에는 이방인에 근친상간에 불륜에 창녀 등의 여인이 등장하고,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동정녀였다. 이처럼 보잘것없고 나약한 사람들을 통해서 하느님은 구원을 이루신다. 첫 독서는 "매질을 당하고 수염을 뜯기는" 모욕을 당하는 하느님의 종을 전한다. 하느님의 약하심의 신비, 그것이 수난 신비의 핵심이다.
예수님은 처형당해 매달린 십자가 상에서 큰 유혹을 받으신다. 사람들은 "네가 유다인들의 임금이라면 너 자신이나 구원해 보아라."라고 조롱하고, 같이 매달린 죄수까지 "당신은 메시아가 아니시오? 당신 자신과 우리를 구원해 보시오."라고 빈정댄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내려오면 모두가 당신을 하느님의 아들로 믿어 줄 것이다. 십자가에서 내려왔다면 세상에 승리하는 하느님, 언제나 성공하고, 항상 자신의 야망을 채워주는 하느님상을 분명히 보여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죽음을 받아들이는 하느님은 없어진다. 수난 복음은 자비로우신 하느님, 인간을 섬기시는 하느님, 인간을 사랑하셔서 당신을 비우시고, 당신 목숨을 바치시는 하느님을 선포한다. 힘센 것을 추구하는 이들은 나약한 하느님을 받아들이기 어렵다. 예수님의 죽음 앞에 제자들이 도망친 것도 하느님이 인간을 사랑하시어 나약하게 목숨을 바친다는 새로운 신관, 혁명적인 가르침을 받아들이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당신이 하느님이라면 힘센 지배력, 통치력을 과시하여 이 문제를 해결하라'고 빈정대는 사람들이 있다. 이는 힘세고 지배하는 하느님을 믿는 신관으로, 예수님이 전한 나약하고 겸손한 하느님 상을 빼앗으려는 유혹이다. 예수님이 드러내신 전능하신 하느님은 타인을 지배하지 않고 섬기는 분이었다. 힘센 것을 추구하고 남을 지배하려는 세상에서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 겸손한 신관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서, 예수님은 당신의 몸으로, 당신의 살로, 십자가로 하느님을 표현하는 수밖에 없었다. 바로 여기에 복음의 핵심이 있고, 성체성사의 신비가 있고, 빵이 되신 그리스도의 모습이 담겨있다.
예수님의 새로운 신관을 받아들여 전적으로 다른 삶을 사는 것이 참 신앙의 모습이다. 참 신앙인은 예수님처럼 다른 사람을 위해서 자신을 비우고 자신을 내어주는 사람이다. 우리가 새로운 하느님 상에 저항하는 이유는, 만약 순수하게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면 우리의 생활 방식을 완전히 바꿔야 하기 때문이다(C. M. Martini). 어떻게 이 저항을 넘어 주님을 따를 수 있을까?
목숨을 내어주신 주님의 사랑에 힘입지 않고는 갈 수 없는 길이 참 신앙인의 길이다.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하는 사랑이라는 말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에게서 참 의미가 드러난다. 예수님이 얼마나 자신을 낮추시어 우리를 사랑하시는지 둘째 독서는 이렇게 전한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은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셨다. 그 사랑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신앙인이 되고, 그 사랑에 힘입어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신 길을 뒤따르게 된다.
[출처] 말씀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