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5주간 목 -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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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제5주간 목 -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날을 보리라고 즐거워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보고 기뻐하였다."
"당신은 아직 쉰 살도 되지 않았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다는 말이오?"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복음)
예수님의 신원에 관한 논쟁은 아브라함을 둘러싸고 이어진다.
쉰 살도 안된 분이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계셨다고?
통상적인 계산으로는 예수님 적대자들의 반박이 이유가 있어 보인다.
예수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 '아브라함은 누구인가?'에 관한 성찰이 필요하다.
아브라함은 누구인가?
아이를 낳을 수 없었던 절망에서 아들을 주신 하느님을 체험한 사람(창세 21,1-6 참조) 이자,
그 아들 이사악을 죽여야 했던 상황에서 "하느님의 마련하심(야훼 이르에)"(창세 22,8)을 체험한 사람,
절망 가운데서 믿음으로 하느님을 체험하여 "아브람에서 아브라함"(독서)이 되었고,
죽음으로 끝나는 인간 한계를 넘어서서,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로마 4,18) 살아간 사람이었다.
아브라함의 최종적 희망은 죽음을 넘어서는 부활을 통해 이루어지는 희망이었다.
아브라함이 "그의 날을 보리라고 즐거워한 것"은 바로 메시아의 죽으심과 부활이었다.(주석성경)
아브라함의 즐거움은 메시아의 날을 미리 내다본 기쁨의 웃음이고(창세 17, 17참조),
아브라함의 기쁨은 물리적 시간(크로노스)을 넘어선 은총의 시간(카이로스)을 누리는 기쁨이었다.
물리적 시간에 묶이고 생물학적 생명만 중시하는 사람에게는 이 진리가 보이지 않는다.
알 수 없으니 믿지 못하겠다는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진리에 저항하고 빛을 거부한다.
그러나 시간의 주인이 내가 아님을 고백하는 이들은 아브라함처럼 절망 가운데서 희망으로 새로 난다.
그들은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 (복음)
이들은 눈에 보이는 것 너머에 계신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보고 노래한다.
"주님은 당신의 계약 영원히 기억하셨네." (화답송)
[출처] 말씀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