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8주일 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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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8주일 나해 - 가진 것을 팔고 나를 따라라
신앙을 갖는 목적을 흔히 구원을 받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세례를 받으면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구원을 받는다고 믿는다. 구원을 받았으면 신앙생활의 목적을 이루었을 텐데, 어떤 이들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조금 더 열심히 살고자 노력한다. 신심 단체에 참여하거나, 성체조배를 하고 성경 통독이나 필사를 하고, 전례 봉사도 한다. 주일 미사만 나가면 되지 뭘 그리 열심이냐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이런 모든 활동의 뿌리는 예수님을 더 가까이 따르고자 하는 영적 갈망이다.
오늘 복음의 등장인물도 그렇게 열심한 사람으로 보인다. 그는 예수님을 찾아와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고 묻는다. 예수님이 "너는 계명들을 알고 있지 않느냐?"라고 되묻자, 십계명 등의 계명은 "어려서부터 다 지켜 왔습니다."라고 대답한다. 앞뒤 정황을 고려할 때 질문자는 종교적으로 성실하였고, 살림살이도 넉넉했던 사람으로 보인다. 그런 사람이 무엇이 아쉬워 새롭게 구도의 길을 찾을까? 먹고사는 문제나 계명 준수를 넘어서서 영원을 향한 갈망이 그를 예수님께 이끌었다. 풍족한 현재에도 불구하고 내면에서 울리는 영원한 삶으로의 초대를 외면할 수 없어서 주님을 찾아왔을 것이다.
그러자 주님은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하고 이르신다. 영원을 향한 갈망이 결실을 맺기 위해서는 기본 의무인 계명 준수로는 부족하고, 자신의 것을 다 내려놓고 주님을 따라야 한다는 말씀이다. 주님과 하나가 되는 영원한 생명은 자신의 능력만으로 쟁취할 수 없다. 주님께서 부르시고 이끌어주시고 완성하시는 일이다. 그러니 주님께서 활동하시도록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르라는 말씀이다. 자신을 버리지 않으면 주님을 따를 수 없다는, 타협의 여지가 없는 말씀이다. 영원한 생명은 상업적 거래나 임시적 계약이 아니라 주님과의 전인적격 관계이기 때문이다.
부자는 "이 말씀 때문에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나갔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복음은 전한다. 이 상황에서 예수께서 이르신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이 말씀에 제자들은 "몹시 놀랐다"라고 전한다. 이때 사용한 단어 ekplesso는 '충격을 받아 공황 상태에 빠지다’라는 뜻이다. 제자들이 왜 이토록 놀랐을까? 모든 생명체는 종족을 보존하는 본능을 가지고 있고, 이를 위해서 강하고 큰 개체가 되려고 한다. 인간이 강해지고 커지기 위해 필요 불가결한 수단은 재산이다. 재산을 포기하라는 말씀은 생존 본능을 거역하라는 말씀이다. 재산이 많으면 천당에 들어가기 힘들다는 말씀은 결국 죽으라는 말씀이나 한 가지였으니 제자들은 충격을 받아 공황상태에 빠졌던 것이다.
도대체 어쩌자고 죽으라는 말씀을 하실까? 종족 보존을 위해서 모든 생명체는 커지고 높아지고 강해지려고 노력을 하지만, 결국은 자기보다 더 크거나 강한 존재에게 먹히고 만다. 살아남았더라도 세월에 장사가 없어 늙고 병들고 쇠약해져 죽고 만다. 후손을 통해 종족은 계승했는지 모르지만 그것은 나의 영원한 생명이 아니라 후손의 유한한 생명일 뿐이다. 결국 인간은 자기 힘, 자기 재산, 자기 능력으로는 생명을 보존할 수 없고, 더욱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다. 그런데 자기를 버리고 주님을 따를 때 주님과 하나가 된다. 영원하신 분과 하나가 됨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살게 된다. 자기를 버리지 못한 채 재물을 움켜주고 거기에만 의지하는 한 주님을 따를 수 없고, 그 상태에서 주님과 하나가 될 수 없고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없다. 그러니 영원한 생명을 갈망한다면 재산이든 명예든 자기 집착을 내려놓고 당신을 따르라는 말씀이다.
우리 자신에게 물어보자. 나는 복음의 등장인물처럼 부자가 아니니까 내려놓을 것이 없을까? 동산이나 부동산만 부는 아니다. "내 것"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 내 시간, 내 옷, 내 취미, 내 생각, 내 경험, 내 자식, 내 자존심... 이 모든 "내 것"이 재산이다. "내 것"은 나의 존재를 드러내고 자아를 안전하고 크게 하려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자기를 보존하려는 생존 본능은 내 것에 집착하게 하고, 그 집착은 불필요한 것까지 모아서 결국 삶을 크고 무겁게 하고, 우리를 거대한 낙타처럼 만든다.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제자들의 이 탄식은 '낙타가 어떻게 바늘귀를 통과한단 말인가?'하는 절망 섞인 탄식이다. 그러자 예수님이 이르신다: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무슨 말씀일까?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갈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바늘구멍보다 작아지면 된다. 어떻게 바늘구멍보다 작아질 수 있을까? "내 것"에서 "하느님의 것"으로 전환할 때 작아지는 길이 열린다. 내 시간, 내 가족, 내 물건, 내 건강을 내 것으로 여기며 집착하기보다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신 시간, 하느님의 선물인 가족, 하느님께서 주신 건강, 하느님께서 내게 맡기신 재산으로 받아들일 때, 나는 하느님 앞에 참으로 자유롭고 무한히 작아진다. 그렇게 하느님이 한없이 커지고 내가 무한히 작아질 때 낙타는 바늘귀를 빠져나간다. 그러기에 사람에게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가능하다고 이르신다.
그것이 첫 독서에서 "지혜와 함께 좋은 것이 다 나에게 왔다. 지혜의 손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재산이 들려 있었다."라는 말씀의 지혜다. 이 지혜가 주님의 말씀에 담겨 있고, 그 말씀은 우리 자신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기에 둘째 독서인 히브리서는 이렇게 전한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예수님을 다시 본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신 분, 세상에서 가장 작은 이로 사신 분, 당신이 가진 모든 것, 심지어 당신의 생명인 살과 피마저 우리에게 내어 주신 분, 그리하여 바늘귀가 아니라 죽음의 문을 통과하신 분이 우리 주님이시다. 그토록 작아지고 낮아지신 주님께서 복음에 등장하던 부자를 바라보시던 사랑 가득한 눈길로 우리를 초대하신다. "내 것"인 줄 알고 있는 인생의 모든 짐을 내려놓고 당신을 따르라고, 그래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라고 초대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