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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길 회헌 47조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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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 제1주일 다해

작성자 : 말씀의성모영보수녀회   작성일: 21-11-29 09:49   조회: 5,066회

본문


대림 제1주일 다해 -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

 


전례력의 새해가 시작되는 대림 첫 주일이다. 대림(adventus)은 "오다, 도착하다"라는 뜻이다. 신앙인들은 2천 년 전 베들레헴 구유에서 태어나셨던 주님께서, 부활 후 재림을 약속하고 승천하셨기에 언젠가 다시 오실 것을 믿는다. 과거의 첫 번째 오심과 미래의 두 번째 오심 사이에 놓인 현재는 중간 시기로 주님을 기다리는 시기이다. 대림절은 이를 기념하는 교회 절기다.

삶은 기다림이다. 농부는 씨를 뿌리며 추수를 기다리고, 산모는 잉태한 후 출산을 기다리며 낚시꾼은 미끼를 던지고 물고기를 기다린다. 밤에는 아침을 기다리고 겨울에는 봄을 기다린다. 누구나 약속시간을 기다리고, 전화를 기다리고, 보낸 편지의 답장을 기다리고, 좋은 소식을 기다린다. 기다림은 우리의 삶을 지탱하게 해주는 버팀목이 되기도 한다. 군대 간 자식이 돌아오길 기다리고, 외출한 자녀의 귀가를 기다리고, 지쳤을 때는 휴식을 기다리며 삶을 꾸려간다.

기다림은 신앙의 여정에서도 필수적이다. 하느님께서는 인간과 약속을 하시고 오랜 기다림의 과정을 거친 후에 열매를 주신다. 이집트를 탈출하여 가나안 땅에 이르기까지 40년을 기다렸고, 다윗에게 주신 구원의 약속이 예수님을 통해 성취되기까지 천년 세월을 기다려야 했다. 하느님은 세상을 즉시 구원하지 않고 왜 사람들로 하여금 기다리게 하실까? 어떤 신학자는 "하느님께서 인간들에게 오래 기다리게 하시는 이유는 기다림이 있어야만 우리의 머릿속에 있는 생각들이 가슴으로 내려오기 때문"이라고 풀이했다. 기다림을 통해서 내가 누구이고, 내가 기다리는 분이 누구고, 무엇을 위해 왜 기다리는지 가슴으로 물어보게 된다. 이렇게 머릿속 이론이 아니라 삶으로 하느님의 구원을 갈망하고 체험할 때 구원이 가슴 깊이 새겨진다.

현대인은 기다리지 못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런데 기다림 없는 결실은 없다. 봄에 심은 벼는 여름의 더위와 가을의 햇빛을 거쳐야 결실을 맺는다. 밥을 짓기 위해서는 뜸을 들여야 하는데 기다리지 못하고 자주 열어보면 어떻게 되나? 기다리지 못하는 풍토는 신앙생활도 어렵게 한다. 말씀을 듣고 기도도 하지만 주님의 응답, 주님과의 만남을 기다리지 못하면 결실이 없다. 기다리지 못하면 믿음을 접어놓고 냉담하거나 이곳저곳 다른 종교를 기웃거리거나 점도 치고 굿도 하며 신앙을 잃어간다.

어떤 마음을 지녀야 충실히 깨어 기다리게 될까? 기다림은 그 대상이 분명해야 한다.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람을 막연히 기다릴 수는 없다, 복음에서 예수님은 그 대상이 누구인지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도록" 기다리라는 말씀으로 분명히 이르신다. "사람의 아들", 곧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기다림의 대상이다. 재물의 축복이나 자식의 출세, 장수나 건강에 앞서 주님을 기다리라는 말씀이다. "사람의 아들 앞에 설" 때, 즉 주님 앞에 설 때 세상을 살아갈 의미와 내 인생의 가치가 완성된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에게 주님이 누구시고, 주님에게 우리가 누구인지, 주님과 우리의 관계를 분명히 이해해야 한다.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종말을 경고하며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이 말씀에서 "속량"의 사전적 뜻은 죄인이나 노예를 풀어주고 지불하는 몸값을 말한다. 성경에서 "속량"은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에게 베푸신 구원을 가리킬 때 사용한다. 이집트 종살이에서(신명 7, 8), 바빌론 유배에서(이사 41, 14), 죄에서(시편 130, 8) 구해주신 사건이 속량이었다. 이 속량은 예수님 안에서 실현된(1코린 1, 30; 콜로 1, 4) 죄의 용서(에페 1, 7)로 완성된다. 하느님께서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아드님을 내놓으셨고, 예수께서는 인간 구원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어 놓으셨다. 이로써 "속량"은 예수께서 값(피, 죽음과 부활)을 치르시어 그분을 믿는 이들이 죄와 죽음의 노예살이에서 해방되어 하느님께 속하게 되었음을 의미하게 되었다. 여기서 "속량"이니, "몸값"이니 하는 표현은 구원을 거래로 보는 것이 아니라, 거저 주시는 구원의 성격을 강조하려는 해방과 자유의 은유적 표현이다.

하느님께서 아드님을 통해 값을 치르고 우리를 해방시키시고 자유를 주셨으니 우리는 하느님의 것이다. 나의 삶은 이제 나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다. "나는 너희 하느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레위 26, 12)라는 말씀대로 "나는 그이의 것"(아가 2, 16)이 되었다. 이것이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인간과 하느님의 관계의 요체로, 우리가 주님을 기다릴 이유다. 내가 주인이 되어 내 생각대로 주인 오실 때를 예상하고, 내 의향 대로 주님을 섬기겠다는 사람에게 주님은 안중에 없고, 안중에 없는 분을 기다릴 까닭이 없다. 자기 자리를 확보하고 자기 생각대로 자기 이익을 쫓으며, 자기 이름 높이려는 사람들에게 인간을 속량하신 하느님은 계시지 않는다.

기다림의 끝에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복음에서 주님이 오시기 전의 상황을 "해와 달과 별들에는 표징들이 나타나고, 땅에서는 바다와 거센 파도 소리에 자지러진 민족들이 공포에 휩싸일 것이다."라고 전한다. 두려운 말씀이다. 그런데 그 공포의 끝에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라는 기쁜 소식이 이어진다. 어둠의 끝이 새벽이듯이, 파멸, 재난, 불안, 공포의 끝이 구원에 맞닿아 있다는 말씀이다. 실제로 파멸과 불안과 공포의 절정인 죽음의 고통은 예수님이 직접 겪으신 일이다. 끝내 주님은 부활을 통하여 진정한 해방을 가져오셨다. 종말 사건은 바로 예수님의 이야기다. 까무러칠 만큼 두려운 종말은 주님께서 겪으신 파스카의 여정이었다.

지금도 전염병, 재난, 불안과 공포가 만연하다. 코로나는 더 위험한 바이러스로 변이 되었다고 하고, 가난한 사람들은 더 살기 힘들고, 아이들은 사라지고, 청년들은 절망하고, 흉악범은 늘어가고, 노환과 질병으로 가족 관계는 힘들어졌다. 이렇게 어둡고 힘들다면 바로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 주님을 기다리자. 죽음을 넘어서신 주님은 이 모든 재앙을 넘어서서 구원을 주는 분이시다. 삶에서 파멸의 두려움이 닥친다면, 죽으시고 부활하신 분을 찾을 때다. 우리가 겪는 재난, 불안, 공포는 까무러칠 때가 아니라 우리를 속량하신 주님, 파스카이신 주님을 만나기 위해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 때다. 내가 주님의 것이기에 머리를 들어 주님 앞에 서서 깨어 기도한다면 대림절은 바로 어둠과 두려움 가운데서도 흔들리지 않는 희망의 시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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