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주간 금요일
본문
연중 제1주간 금 -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스스로 뽑은 임금 때문에 울부짖겠지만, 그때에 주님께서는 응답하지 않으실 것이오."
"상관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임금이 꼭 있어야 하겠습니다." (독서)
사무엘 예언자가 왕정체제의 부조리를 강력히 설파하지만 그래도 백성은 임금을 뽑자고 고집을 부린다.
종교적인 우상(어제 제1독서) 외에 사람들이 의지하는 위험스러운 힘은 정치적 우상이다(F. Varillon).
왕, 대통령, 이념, 파당 등 정치적 우상들은 개인의 무력함과 한계를 보완해 줄 힘이 될 듯 보인다.
그러나 정치든 사회든 종교든 지도자의 자리에 오른 사람들은 종종 자기가 하느님인 양 독선에 빠진다.
그들은 무조건적 복종을 요구하여 사람들과의 소통을 거부하고 국민을 노예로 만들어 마비를 초래한다.
인간을 마비시키는 종교적 우상이나 정치적 우상, 개인의 무력감을 넘어설 희망은 어디서 올까?
마비된 중풍병자를 고치시는 복음의 예수님에게서 그 희망과 해방을 만난다.
"그때에 사람들이 어떤 중풍 병자를 그분께 데리고 왔다." (복음)
중풍은 몸의 마비 증세로써 중풍병자는 원하는 행동을 하지 못하게 된다.
의지를 박탈 당한 채 자신의 본 모습을 살지 못하는 상태라면 누구든 그가 중풍병자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당시 시각에서 병은 죄의 결과로 보았기에, 치유는 죄를 용서받은 표지다.
'죄'는 한편으로 '빚'으로 간주되기도 했기에 용서는 빚의 탕감(속량)을 뜻한다.
따라서 예수께서 선언하신 용서는 빚의 탕감 선언, 해방의 선언이었다.
마비된 증세의 극복이 치유라면, 마비 원인의 제거가 용서라고 할 수 있다.
마비 원인의 제거인 용서가 증세의 제거보다 근원적이기에 치유에 앞서 용서를 선언하신다.
당시 신앙에 의하면 하느님만이 인간이 지은 죄, 값을 길 없는 빚을 속량하시는 분이셨다.
그러기에 율법학자들은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라고 항의한다.
예수님은 당신이, 즉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선언하신다.
예수님을 통한 하느님의 드러나심이다. 그러니 "모든 사람이 크게 놀라 하느님을 찬양"한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들것'은 중풍병자가 앓던 마비 증세의 상징인데, 치유로 쓸모 없어진 들것을 왜 들고 가라 하실까?
용서와 치유를 받았다면 장애의 상징인 들것은 더 이상 우리 삶을 방해하지 않는다.
이제 '들것'은 용서하신 분을 기억하게 하는 도구로 바뀌어 가볍게 들고 갈 표지가 된다(A. 그륀).
마비되었던 과거를 상기시키는 '들것'을 통해 치유의 '기억'을 늘 간직하라는 말씀으로 들린다.
삶을 마비시키는 장애 현상은 온전히 없어지지 않고 재발할 수 있다.
치유의 기억은 다시 등장하는 장애를 극복할 힘이 되기에 늘 지녀야 할 선물 아닐까?
"그러자 그는 일어나 곧바로 들것을 가지고,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밖으로 걸어 나갔다."
매일 접하는 신체적, 윤리적, 정치적 마비 증세들과 그 앞에 무기력한 인간 모습을 본다.
원인이 제거되지 않는다면 마비 증상은 형태만 달리하여 다시 나타나곤 한다.
마비된 내 모습을 주님 앞에 드러내고, 마비된 이웃을 주님 앞에 데려가면 주님께서 용서를 선언하신다.
그렇게 주님으로부터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하시는 용서와 치유의 말씀을 듣고,
"일어나 밖으로 걸어 나가는" 새로운 탈출(Exodus), 해방의 길을 가라는 초대로 말씀이 다가온다.
[출처] 말씀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