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5주일 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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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5주일 다해 -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지난 주일,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건을 통해 선입견과 편견에 묶인 인간의 어리석음을 살펴보았다. 어떻게 이 어리석음에서, 어두운 우상의 동굴로부터 빠져나올 것인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는 사건들을 전하는 오늘 말씀에서 어리석음에서 헤어날 길을 찾을 이정표를 만난다.
사람의 어리석음은 무지에서 온다. 자신도 모르고 세상도 모르기에 어리석은 생각이나 행동을 한다. 아는 것이 힘이기 때문에 사람은 공부를 한다. 사람이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 곧 천명(天命)이다. 옛 교리문답 첫 문제가 "사람이 무엇을 위하여 세상에 낫느뇨?"라는 질문이었다. 공자님은 쉰 살에 이르러 하늘의 명(天命)을 알게 되니, 이후 예순에는 남의 말을 들으면 그 이치를 이해하고(耳順), 일흔이 되어서는 '무엇이든 하고 싶은 대로 하여도(從心) 법도에 어긋나지 않았다'라고 어리석음에서 깨어나는 과정을 일러주었다. 융(C.G.Jung)은 인간의 성숙이 높은 자리에 오르거나 큰 성공에 있지 않고, 자기 자신이 되어감, 곧 자기화라고 설명한다.
교리서의 창조 목적을 깨달음, 공자의 지천명의 길, 심리학의 자기 자신이 되어가는 과정이 신앙인에게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듣고 따르는 데에, 즉 소명과 추종에 있음을 오늘 주님 말씀은 일러주신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세상의 방식과 하느님의 방식이 다르다. 일반적으로 천명을 깨달으려면 먼저 인간이 하늘의 뜻을 깨닫도록 열심히 수련을 하고 노력한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하느님께서 인간 앞에 먼저 나타나신다. 첫 독서에서 주님께서는 이사야에게 나타나시고, 둘째 독서에서 다마스쿠스로 가던 바오로에게 주님께서 나타나시고, 복음에서는 고기 잡던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 먼저 다가가신다.
이렇게 먼저 나타나시는 주님 앞에서 인간은 놀라움과 더불어 자신의 부당함을 절감한다. 이사야는 “큰일났구나. 나는 이제 망했다.” 하고 두려워한다. 바오로는 자신이 “사도들 가운데 가장 보잘것없는 자로서 사도라고 불릴 자격조차 없는 몸”이라고 고백한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하고 고백한다. 하느님 앞에서 그 엄위에 놀라고, 다른 한편 우리 자신이 얼마나 부당한 죄인인가를 깨닫고 하느님 앞에 엎드릴 때 부르심이 시작된다.
하느님께서는 왜 우리를 부르실까? 절대자 하느님께서는 무엇이 부족한 분이 아니시다. 인간의 봉사가 필요해서 우리를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부르신다.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에 태어난 목적을 알고, 자기 자신이 되라고 부르신다. 그러므로 부르심을 받는 입장에서 자격이나 능력이 필요하지 않고, 주님과의 인격적 관계에 들어설 순수한 태도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부르심을 따르는 길에서 우리의 부족함은 하느님께서 채우신다. 오늘 성경 말씀은 공통적으로 이를 전한다.
첫째 독서에서 이사야가 “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이다.”라고 말하자 천사가 사명을 수행할 수 있도록 뜨거운 돌로 입술을 씻어 준다. 복음에서 고기 잡이의 대가인 어부 베드로가 목수인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자, 밤새 한 마리의 고기도 낚지 못했지만 대낮에 그물이 찢어지게 고기가 많이 잡힌다(당시 물고기는 본래 야간에 잡았다고 한다). 자신과 예수님이 이토록 다르다는 놀라움에 베드로가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하고 고백하자 예수께서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라고 이르신다.
하늘이 주신 생명, 천명에는 뜻이 있어서 그를 깨달을 때 지천명을 이루듯, 주님의 부르심에는 뜻이 있고 그 뜻은 곧 사명으로 드러난다. 이사야를 부르시어 말씀을 전하라 명하시고, 베드로를 부르시어 사람 낚는 어부가 되라고 명하시고, 바오로를 이방인의 사도가 되라고 부르신다. 부르신 사명의 수행이 바로 우리가 우리 자신이 되는, 자기완성을 이루는 길이다.
유대교 랍비 수샤는 임종 직전에 이런 말을 남겼다: "하느님께서는 내가 죽은 뒤에 나를 보시고 '너는 왜 모세가 아니었느냐?'하고 묻지는 않고, '너는 왜 수샤가 아니었느냐?'하고 물으실 것이다."(마틴 부버, 인간의 길, 22) 하느님께서는 부르심과 추종을 통해 우리가 타인을 흉내 낼 것이 아니라 본래의 고유한 자신이 되길 바라신다.
이사야에게, 바오로에게, 베드로에게 나타나셨듯, 오늘도 주님께서는 우리 앞에 나타나신다. 미사 성제 때, 말씀 가운데, 주님을 찾는 일상에서 주님께서 오신다. 이사야와 바오로와 베드로처럼 그분 앞에 먼저 자신이 부당함을 고백하자. "내 탓이오"라는 참회로 미사가 시작되듯, 주님 앞에 엎드릴 때 부르시는 말씀이 들리고 사명과 더불어 사명을 수행할 힘도 주신다.
그 부르심과 사명은 능력을 검증하거나 짐을 지우기 위함이 아니라, 참으로 우리가 살아갈 이유를 깨달아 우리 자신이 되라는 초대이다.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라는 말씀은 생존을 위해 물고기를 낚던 삶에서, 하느님께서 나를 창조하신 목적인 천명을 알고 그것을 이루는 삶으로 변화하라는 초대 말씀이다. '이제부터 너의 고유한 모습, 너 자신이 되라.'는 초대다. 이 부르심을 듣고 어떻게 할 것인가? 복음은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의 모습을 이렇게 전한다: "제자들은 배를 저어다 뭍에 대어 놓은 다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출처] 말씀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