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회원가입  |   로그인  |   오시는 길
우리는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이 세상에 정의와 평화를 가져오도록 노력한다.
(말씀의 길 회헌 47조 참조)
말씀의 숲
영성의 향기 말씀의 향기 수도원 풍경 세상.교회의 풍경 기도자리
말씀의 향기

연중 제4주일 다해

작성자 : 말씀의성모영보수녀회   작성일: 22-01-31 09:19   조회: 4,589회

본문


연중 제4주일 다해 -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예수님은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묶인 사람들에게 해방을 전하며, 눈먼 사람들을 보게 하고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 하기 위해 오셨다는 말씀을 지난 주일 들었다. 그 구원은 "오늘", 지금 여기서 이루어질 실재임을 묵상하였다. 그런데 모든 이가 은총을 체험하지는 못한다. 복음에서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예수님도 당신의 능력을 드러내지 않으신다. 왜 이런 안타까운 상황이 벌어졌을까? 고향 사람들의 태도가 원인이었다. 그들은 예수님을 두고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라고 말한다. 예수님과 그 집안 내력 등등 내가 다 알고 있다는 선입견에 예수님과 그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자기 기준으로만 세상을 보는 선입견은 진리를 보지 못하게 눈을 가리고, 구원의 기쁜 소식을 듣지 못하게 귀를 막는다.

영국의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은 인간의 참된 인식을 가로막는 네 가지 우상에 대해 이야기한다. 첫째는 종족의 우상으로, 자신이 속한 종족을 기준으로 세상을 보는 편견이다. 출신에 따라 사람을 편파적으로 대하면 진리를 보지 못한다. 둘째는 동굴의 우상으로, 평생을 동굴에서 살던 사람이 세상에 나와 제대로 사물을 보지 못하듯, 자기의 경험에만 비추어 세상을 판단하면 진실을 보지 못한다. 셋째는 시장의 우상으로, 시장에서 떠도는 언어에 묶이면 진실을 외면한다. 소문이나 가짜 뉴스를 절대시 하는 편견을 말한다. 끝으로 극장의 우상이란 배우들이 극장에서 대본을 읽는 것처럼, 특정한 이론이나 사상을 맹신하여 대본 읽듯 반복하는 편견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의 출신을 잘 안다는 종족의 우상, 자신들의 과거 경험만을 판단 기준 삼는 동굴의 우상, 예수님에 관한 소문에 묶인 시장의 우상, 관습을 무비판적으로 예수님께 적용하는 극장의 우상에 빠져 예수님을 판단한다. 이러한 우상에 빠지면 진리를 외면한다. 진리이신 예수님은 진리를 외면하는 이들에게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지금도 우상에 빠지면 자신의 경험이나 출신이나 남의 소문이나 특정 주장만 믿고 상대방을 판단하여 불화를 초래한다. 부부지간이든 부자지간이든 친구사이든 상대방의 말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편가르기를 한다. 그 결과 가정과 사회에  불화와 불신 혐오가 만연하다.

어떻게 이 우상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떠나야 한다. 혈연, 지연, 학연에 매인 종족의 우상에서 떠나고, 자기 경험에 묶인 동굴의 우상에서 떠나고, 소문과 가짜 뉴스에 부화뇌동하는 시장의 우상으로부터 떠나고, 이념과 파당에 묶이는 극장의 우상으로부터 떠나 자유로워져야 한다. 그를 위해 진리이신 말씀 앞에 서야 한다. 우상을 떠나 진리이신 말씀에 의존할 때 그 진리가 우리에게 자유를 준다. 그 자유로 우리는 꿋꿋이 신앙의 길을 가게 된다. 오늘 예수님은 우상에 빠져 편견에 사로잡힌 사람들에 의해 벼랑 끝에 몰리시지만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 어떤 우상에도 묶이지 않은 자유인의 길을 상징적으로 그린 말씀으로 들린다. 예수님처럼 말씀에 근거하여 당당하게 떠나가라는 초대이기도 하다.

예수님처럼 당당하게 떠날 힘의 근거를 첫 독서가 제시한다. 성경에서 예언자는 사람들에게 하느님 중심으로 살라고 요청하는 사람이다. 자기중심으로 살아온 익숙하고 습관적인 사고방식을 바꾸라고 요구하므로 사람들은 예언자를 불편하게 여긴다. 예레미야가 사람들이 두려워 이 소명으로부터 도망치려 하자, 주님께서 "너는 그들 앞에서 떨지 마라. 그랬다가는 내가 너를 그들 앞에서 떨게 할 것이다. 그들이 너와 맞서 싸우겠지만 너를 당해 내지 못할 것이다. 내가 너를 구하려고 너와 함께 있기 때문이다."라고 약속하신다. 소명은 하느님이 주신 것이므로,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느님의 힘으로 예언직을 수행하라는 말씀이다.

모든 선입견과 편견과 두려움에서 떠나, 하느님과 함께하는 가장 중요한 예언적 증거가 사랑(제2독서)의 실천이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사랑은 참고 기다립니다…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사랑은 언제까지나 스러지지 않습니다." 모두 좋아하는 참 아름다운 말씀이지만, 사랑을 오해하면 말 잔치에 불과하다.

성경에서 사랑은 낭만적 연애 감정이 아니다. 유쾌한 느낌이나 정서도 아니다. 성경을 종합하여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렇게 정의한다: "사랑은 보상에 대한 아무런 기대나 갈망을 품지 않고, 사랑받는 이를 위해 그의 선익을 지향하는 것이다." (신학대전 II-II, 27, 2) 사랑받는 이의 선익을 바라기에 사랑은 상대방에게 자신을 무상으로 내어 놓는다. 여기서 사랑은 감정이나 정서를 넘어서서 의지적으로 노력해야 할 의향이자 행동 방식이다. 이는 마치 예레미야가 환난 중에 예언직을 수행하였고, 예수께서 사람들의 몰이해와 위협 가운데서도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듯 고된 노고를 요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천할 힘은 먼저 우리를 사랑하시어 우리와 함께 계신 하느님의 사랑에서 온다. 그 사랑이 모든 어려움을 넘어서게 하고 죽음까지 물리치셨다. 죽음을 넘어서서 부활을 가져온 하느님의 사랑이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좋은 약은 입에 쓰다. 좋은 이야기는 귀에 거슬린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더 나은 신앙생활을 하라는 이야기를 거북스러워한다. 왜 귀찮게 핸드폰을 절제하라, 성경을 읽어라, 미사에 나와라, 봉사하라 등등 잔소리를 하냐고, 그렇게 하지 않고도 잘 살고 있다고 투덜댄다. 하느님의 말씀, 예언의 말씀은 나에게 불편한가? 그렇다면, 내가 자기 틀에 안주하여 예수님을 거부하던 나자렛 사람일지 모른다. 바로 내가 선입견과 편견의 우상에 빠져 새로운 변화에 마음을 닫고 있지 않을까? 하고 물어보아야 한다.

예언직을 수행하려면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남에게 선행을 권할 때 사람들이 "너나 바로 해라."라는 식으로 나오는 이들은 언제나 있어왔다. 예수님도 고향 사람들에게 거부당하시며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라고 이르신다. 편견에 사로잡히게 만드는 우상은 그렇게 지금도 만연해 있다. 그럴수록 "내가 너를 구하려고 너와 함께 있다."라는 하느님 말씀을 믿고, 힘을 내어 그들 가운데를 가로질러 당당하게 떠나서, 말이 아닌 행동으로 내 이익이 아닌 상대방을 위한 사랑을 실천하자. 그때 하느님 나라가 다가온다. 그때 하느님께서 주신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이다.

 


[출처]  말씀에



 

해뜨는 마을 l 영보자애원 l 영보 정신요양원 l 천안노인종합복지관
교황청 l 바티칸 뉴스 lCBCK 한국천주교주교회의
한국 천주교 여자수도회 l 한국 천주교 주소록 l 수원교구
우. 13827 경기 과천시 문원청계길 56 말씀의성모영보수녀회
56 MunwonCheonggyegill Gwachon-si Gyeonggi-do TEL : 02-502-3166   FAX : 02-502-8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