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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길 회헌 47조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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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제3주일 다해 - 와서 아침을 들어라

작성자 : 말씀의성모영보수녀회   작성일: 25-05-05 09:08   조회: 523회

본문

부활 제3주일 다해 - 와서 아침을 들어라

 

부활 세 번째 주일 복음은 부활하신 예수님과 제자들의 세 번째 만남에 대해 들려준다. 지난 주일,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듣고도 제자들은 두려워하고 토마스는 의심했던 말씀을 들었다. 오늘도 제자들은 여전히 실의에 빠진 모습이다. 일곱 명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 생업의 현장이었던 티베리아스 호숫가로 낙향하였고, 베드로는 언뜻 생각난 듯 "나는 고기를 잡으러 가네."라고 말한다. 마치 공허한 순간에 어쩔 줄 몰라서 옛날 일이나 하겠다는 태도다. 다른 제자들도 "우리도 함께 가겠소."라고 말한다. 이들 역시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따라나서는 모습이다. 스승의 죽음으로 받은 충격이 너무 커서 거기서 헤어나지 못한 채, 주님의 부활 소식을 듣고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는 모습이다. 그 상태에서 제자들은 "밤새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아침이 될 무렵" 예수님이 나타나신다.

 

요한 복음을 알아듣기 위해 중요한 해석의 열쇠가 있다. 물리적 차원의 이야기에는 영적 차원의 상징이 담겨 있다는 점이다. 오늘 고기를 잡는 일곱 제자는 묵시록의 초대교회의 일곱 교회를 상징한다. 밤 시간의 바다는 악령이 들끓는 시간이고 아무것도 잡지 못한 빈 그물은 초대 교회에서 겪던 어려운 상황을 상징한다. 세상살이에 많은 애를 쌌지만 다 헛수고로 느껴질 때, 믿음의 중심에 부활하신 분이 계시지 않을 때가 있다. 바로 이러한 어둠과 공허 속에 아침 해를 받으며 주님이 나타나신다.

 

혼돈의 바다와 밤의 어둠을 이기신 주님이 제자들에게 물으신다.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 다 큰 어른인 제자들에게 왜 반말을 하실까? 여기서 얘들이란 말 뜻은 '어린 사람들', 즉 아직 깨달음 이전의, 주님의 현존을 체험하기 이전의 상태를 뜻한다. 예수께서 "무얼 좀 잡았느냐?"고 물으신 것은 제자들뿐 아니라 삶에 지친 모든 인간에게 던지는 물음이다. 밤새 고달픈 노동을 통해 먹고살 수 있는 양식을 마련하였는가? 영혼의 굶주림을, 삶의 의미를 채워 줄 양식을 마련하였는가? 제자들은 "못 잡았습니다." 하고 고백한다, 열심히 노력했지만 돌아보면 허전함 가득한 삶을 인정하는 답변이다. 그런 이들에게 주님이 말씀하신다.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무의미하고 허전한 삶을 넘어서기 위해 새롭게 시작하여야 한다. 그런데 고기 잡던 현장이 아닌 곳에서, 일상이 아닌 엉뚱한 데서 시작할 필요는 없다.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라는 말씀에서, 오른쪽은 빛이 비치는 곳을 상징한다. 지금까지 밤에 속하는 쪽, 세상 쪽에서 해 오던 일을 이제 낮에 속하는 쪽, 부활의 빛이 비치는 주님 말씀에 따라 다시 시작하라는 말씀이다. 그러자 "그물을 끌어올릴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고기가 잡혔다고 한다. 나의 노력으로는 무의미하고 가망 없던 일이 주님의 말씀에 따라 새로이 시작할 때 의미로 가득 채워지는 것을 상징하는 말씀이다.

 

이 상황에 "예수님께서 물가에 서 계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분께서 예수님이신 줄을 알지 못하였다."라고 말씀은 이어진다. 삶에서, 특히 절망하고 체념할 때 주님이 우리 곁에 계심을 알아보기가 쉽지 않다. 그때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주님이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사랑이 사랑하는 사람을 보게 한다. 그렇게 오신 주님은 "와서 아침을 들어라." 하고 제자들을 부르신다. 최후의 만찬이 연상되는 장면이다. 그때처럼 주님은 말씀과 빵을 나누어 주신다. 살과 피를 내어주시는 성체성사가 재현된다. 그 사랑에 충격과 실의와 낙담을 넘어서는 길이 열리고 공동체가 중심을 잡는다.

 

​​주님이 마련하신 식사 자리, 성찬례에서 주님이 질문하신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비록 수난 현장에서 주님을 세 번 모른다고 한 시몬 베드로지만, "주님이십니다."라는 말에 호수로 뛰어들었던 베드로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할 리 없으실 텐데 왜 물으실까? 사랑하는 연인들은 뻔히 알면서도 질문한다: "나를 사랑해?" 주님은 우리가 당신을 사랑하기를, 당신이 우리로부터 사랑받기를 바라시기에 질문하셨으리라. 지금도, 우리 각자의 이름을 부르시며 질문하신다.

 

​​",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라고 답변하는 베드로의 모습이 마음에 깊은 울림을 준다. 베드로는 자신의 힘으로 예수님을 사랑하려고 열정적으로 노력하였다. 그러나 그 노력은 주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 부인하는 실패한 사랑으로 끝났다. 그러기에 자신을 주어로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할 수 없었다. 베드로의 사랑은 자신이 아닌 주님께 바탕을 둔 사랑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주님을 주어로 "주님께서 아십니다"라고 고백한다. 그 체험이 가슴 깊이 사무쳤기에 세 번의 질문에 세 번 다 "주님께서 아십니다."라고 고백한다. 그 사랑 고백이 사도직의 바탕이었다.

 

베드로의 절절한 고백에 주님은 반복하여 이르신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양들을 돌보는 사목 직무, 즉 당신을 따르는 사도직은 주님의 사랑에 응답하는 사랑이다. 탁월한 능력으로 훌륭하고 위대한 업적을 성취하기에 앞서,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시는 예수님과의 내밀한 관계가 사목의 핵심임을 암시하는 말씀이다.

 

​​예수님은 세 번씩이나 사랑을 확인하신다. 당신을 사랑하고자 하지만 쉽게 넘어지는 우리를 당신은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격려를 세 번 반복하신다. 우리 자신이 아닌 당신 사랑에 우리 삶의 뿌리를 두라고 초대하신다. 그러기에 베드로와 더불어 고백한다: "주님이 아십니다. 당신을 사랑하려는 저의 열정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턱없이 허약한 저를 당신께서 아십니다. 저의 사랑은 그러기에 나를 아시는 당신에게 뿌리를 둘 수밖에 없습니다. 저의 사랑은 당신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끝으로 베드로에게 이르신다: "나를 따라라." 수난 전, 어디든 주님을 따르겠다는 베드로에게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다. 그러나 나중에는 따라오게 될 것이다."(요한 13, 36)라고 하셨었다. 그때 이르신 "나중에"가 죽음과 부활을 겪으신 지금이다. 당신을 따름은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따름이라고, 그것이 당신을 사랑하는 길이라는 말씀으로 들린다.

 

[출처] 말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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