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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이 세상에 정의와 평화를 가져오도록 노력한다.
(말씀의 길 회헌 47조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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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제2주일 -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작성자 : 말씀의성모영보수녀회   작성일: 25-05-01 15:06   조회: 540회

본문

부활 제2주일 -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누구시며, 어떻게 만날 수 있는지, 오늘 복음은 토마스와 제자들 이야기를 통해 일러준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부활 후 두려움에 문을 모두 잠그고 숨어 있었다고 한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데 왜 두려웠을까?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자신들이 체험하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부활 신앙은 소문 등 남의 이야기를 믿는 것이 아니다. 어떤 형태로든 자신이 주님을 만나야 발생하는 신비다. 부활 신앙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역사적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분을 내 삶에 받아들이고, 부활하신 분을 바탕으로 세상을 보고, 부활하신 분에 의지하여 영원한 삶을 희망하는 신앙이다.

 

그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라고 복음은 전한다. 주님이 먼저 우리를 찾아오신다. 말씀을 통해서든 성체성사를 통해서든 다가오시는 주님을 받아들일 때 주님을 만난다. 그렇게 만난 주님이 주시는 평화가 두려움을 몰아낸다. 평화는 성경에서 단순히 위험이 해소된 상태만 아니라 전 인간적인 안녕 상태를 말한다. 하느님의 품 안에 받아들여졌을 때 몸과 마음 전체가 느끼는 안전 상태가 부활하신 주님이 주시는 평화다.

 

이어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성령을 받아라.” 하고 말씀하셨다." 성경에서 성령(루아하)은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의 숨결이었다. 창조의 숨결인 성령을 받으라는 말씀은 하느님의 숨으로 살라는 말씀이다. 삶이 내가 좌우할 수 있는 내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느님 것이기에 하느님의 섭리에 맡기라는 말씀이다. 마음을 열고 성령을 받아들여 하느님께 나의 모든 삶을 맡기면 두려움이 없어진다. 아무리 험한 세상일지라도 부활하신 분의 손을 꼭 잡고 가면 두려워할 것이 없다.

 

예수님은 거듭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고 인사하신다. 미사 때 나누는 평화의 인사가 여기서 유래한다. 이 인사는 신자들이 서로를 축복하는 차원의 평화가 아니라, 십자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주님의 평화다(그래서 다른 말로 변경할 수 없다). 이어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라는 파견의 말씀을 하신다. 스승의 죽음 현장을 외면한 제자들은 주님께서 주신 소명을 상실한 상태였다. 그래서 스승의 부활 소식에도 두려웠을 것이다. 그런 제자들에게 주님은 사명감을 회복시켜 주신다.

 

그런데 토마스는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라고 말한다. 토마스는 왜 믿지 못했을까?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구도 스스로에게 생명을 줄 수 없듯 스스로에게 신앙을 주지 못한다. 자신의 힘으로 믿는 것은 주님의 가르침에 따른 신앙이 아니라 자기식의 신앙이다. 부활은 사도적 전승에 기초를 두고 있다. 진정한 신앙은 제자들과 함께, 즉 공동체의 전승을 통해서 드러난다. 그래서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라고 이르신다. "너희", 즉 제자들로 이루어진 교회에 당신의 권한을 주신다.

 

보지 못해서 믿지 못하겠다는 토마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은 당신의 상처를 직접 만져보라고 이르신다. 그러자 토마스는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한다. 이는 히브리 말로 "아도나이 야훼"로서, 하느님께만 드리던 최상의 신앙고백이다. 하느님께만 드린 고백을 예수님에게 드렸다는 사실은 예수님이 하느님이란 선언이다(R. E. 브라운).

 

"저의 주님"이란 말은 소문을 듣고 믿는 막연한 주님이 아니고, 자기감정을 투사하여 스스로 만든 신이 아니라, 내가 만나고 나와 인격적 관계를 맺은 주님을 말한다. 예수님은 나를 아시고 내가 참으로 체험했기에 전적으로 신뢰하고 의지하는 주님이라는 신앙고백이다. 당시 로마 제국의 황제는 자신을 주님으로 참칭했다. 그 상황에서 예수님에게 드린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는 고백은 황제든 권력자든 세상의 주인 행세하는 힘센 것들이 나의 주인이 아니라는 고백이다. 사람이든 재물이든 이념이든 건강이든 성공이든 다른 무엇도 나의 주인이 아니고, 부활하신 예수님만 나의 주님이고 하느님이라는 선언이다. , 부활 신앙은 객관적으로 벌어진 일에 대한 동의가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에게 꼼짝없이 당한"(W. 카스퍼) 상태의 신앙, 예수님에게 사로잡힌 신앙을 말한다.

 

복음에서 토마스는 "쌍둥이"였다고 한다. 대개 쌍둥이는 모습이나 행동이 닮았다. 토마스의 쌍둥이는 누구일까? 교부들은 토마스의 쌍둥이는 바로 주님을 따르는 신앙인들이라고 해석했다. 혼자 살아보려고 공동체를 떠나기도 하고, 보지 못해서 믿지 못하겠다고 우기기도 하고, 그러다가 예수님을 만나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으로 고백하는 신앙인의 여정이 바로 토마스의 여정이기에 우리가 토마스의 쌍둥이라고 풀이하였다. 토마스가 보고 만졌던 주님의 몸을 우리도 미사 때마다 받아 모신다. 나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분을 모시는 그 순간 우리도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하고 고백할 수 있는 부활 신앙을 기도하자.

 

예수님은 끝으로 토마스에게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라고 말씀하신다.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은 인간의 고통과 상처를 보면서 거기서 보이지 않는 예수님의 상처를 보고, 더 나아가 그 고통이 부활로 이어지는 신비를 믿는 사람들이다. 즉 세상의 고통과 상처를 주님의 죽음과 부활에 결합하는 이들이다. 보지 않고 믿는 이들은 힘들고 아픈 삶을 절망으로 끝내지 않고 새로운 삶으로 부활하리라고 믿는 이들이다. 그러기에 현실이 아무리 어둡고 힘들더라도 희망을 잃지 않으며, 하느님의 자비를 믿기에 세상이 줄 수 없는 행복을 누린다. 그들에게 주님이 이르신다: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출처] 말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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