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수난 성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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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수난 성금요일 - 보라 십자나무
하느님의 아들이 인간의 죄를 짊어지고 돌아가신 참담한 날이다. 오늘 전례의 말씀은 주님의 수난과 죽으심이 우리를 위해, 나를 위해 벌어졌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첫 번째 독서는 주님의 종의 수난을 전한다. 그는 "사람들에게 멸시받고 배척당한 고통의 사람, 병고에 익숙한" 사람이다. 무엇 때문에 그런 수모를 당했을까? "그는 우리의 병고를 메고 갔으며 우리의 고통을 짊어졌다."라고 이사야서는 전한다. 우리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고통을 겪었다는 말씀이다. 두 번째 독서 히브리서는 예수님께서 죽음을 앞두시고 "큰 소리로 부르짖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다." 그래서 "우리의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다"라고 전한다. 우리의 구원을, 나의 구원을 위해 예수님이 죽임을 당하셨다는 말씀이다. 복음은 예수께서 나를 위해 당하신 수난의 여정을 생생히 전한다. 수난 현장에서 선포되는 말씀을 따라 그 신비에 참여하자.
예수께서는 배반당하고 붙잡힌 다음 유대 의회에서 매질과 더불어 종교 재판을 받으신다. 사형을 판결한 권한이 없는 의회 지도자들은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보내 사형을 요구한다. 심문 결과 예수님으로부터 아무런 죄목을 발견하지 못한 빌라도는 예수님을 매질하고 가시관을 씌우는 모욕을 준 후 유다인들에게 처참한 몰골의 예수님을 보여주며 "자, 이 사람이오."(요한 19, 5: Ecce Homo! 이 사람을 보라!) 하고 말한다.
빌라도의 이 말에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신 사건의 가장 깊은 뜻이 담겨있다(R. 불트만). 빌라도가 보라는 "이 사람"은 고통을 받고, 상처를 입고, 멸시를 당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분이 "말씀이 사람이 되신" 분이다(요한 1,14). "이 사람"은 사람을 사랑해 세상에 오신 하느님이시다. '이 사람을 보라!'는 선언으로 하느님의 모습뿐 아니라 하느님께서 지으신 인간의 참 모습도 드러난다. 예수님과 우리를 다시 보자. 예수님의 겉모습이 아무리 고난과 상처로 얼룩졌더라도, 본성은 변함없이 참 인간이자 참 하느님이시다. 그처럼 우리가 아무리 많은 고난과 상처를 입었더라도 우리에게는 하느님을 닮은 존엄성이 있다. 예수님의 수난에서 인간의 존엄성은 그렇게 드러난다. 이처럼 수난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고난과 상처 속에 사는 인간에게 희망의 상징이 되신다(베네딕토 16세).
그런데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는 대중의 외침에 빌라도는 사람들에게 무죄한 "예수님을 넘겨준다." 주님의 수난은 인간의 존엄성과 더불어, 인간과 세상의 이면에 있는 무기력과 비겁과 불의를 드러낸다. 결국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십자가상의 예수님은 누구인가? "제자들에게서 버림받고, 유다에게 배신당했으며, 베드로에게 부인당하고, 수석 사제들에게 불경죄로 고발당하고, 군중에게 살인자의 편을 들었다고 무시당하고, 최고 의회와 로마 병사들 그리고 십자가에 다가온 모든 사람들에게 조롱당했으며, 어둠에 둘러싸여 그의 하느님에게도 버림을 받은 듯한"(R. 브라운) 분이시다. 예수님은 이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시나? 십자가 상의 예수님은 우리에게 누구인가? 그분께서 죽음 앞에서 남기신 말씀을 새겨보자.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어머니에게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라고 말씀하신다. 이어서 요한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라고 이르신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주실 수 있는 것을 다 주신다. 당신을 고발하고, 배반하고, 부인하고, 모욕을 준 인간들을 위해 당신의 살과 피를 주셨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당신에게 가장 소중한 어머니를 넘겨주시고, 어머니 마리아에게 우리를 자녀로 맡기신다. 인간을 끝까지 사랑하시는 모습이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께서는 "목마르다."라고 호소하신다. 당신의 목마르심은 바로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아버지의 뜻을 이루려고 겪으시는 갈증이었다. 우리의 목마름이 성경 말씀을 이루려는 목마름, 내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찾으려는 목마름으로 이어질 때 하느님의 뜻이 예수님에게 이루어졌듯 우리 안에서도 이루어진다.
그리고 예수님은 "다 이루어졌다."라고 외치며 돌아가신다. 예수께서 "다 이루신" 것은 아버지의 뜻인 우리의 구원이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일곱째 날 쉬셨던 그 일이 예수님의 쉼으로 온전히 완성된다. 이제 초라함과 무기력, 불확실함 속에서 병들고 늙고 죽어가야 하는 인간 한계가 극복되는 길, 창조가 완성되는 길, 창조된 인간의 삶이 의미를 지니는 길이 새롭게 열린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하느님의 창조가 다 이루어졌다는 말씀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끝까지 인간을 사랑하신다.
숨을 거두신 예수님의 창에 찔린 옆구리에서 피와 물이 흘러나온 사실을 전하며 복음서는 "그들은 자기들이 찌른 이를 바라볼 것이다."라는 말씀을 전한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바라보라는 초대이다. "예수님을 바라보는 사람은 영광스러이 변화할 것이다. 바라봄을 통하여 그들은 통찰에 이른다. 그리고 통찰을 통하여 그들의 삶은 변하고 쇄신된다. 바라봄을 통하여 사람은 바라보는 것과 하나가 된다. 우리가 상처 입은 분을 바라보아야 할 이유는 예수님의 상처에서 우리는 구원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상처 입은 예수님에게서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본다. 예수님의 거룩한 상처를 통해 우리는 볼 수 없는 하느님의 사랑을 바라보고 묵상하고 마음에 새기게 된다." (A. 그륀)
"보라 십자나무. 여기 세상 구원이 달렸네."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을 통해서 구원이 온다. 십자가를 경배하며 나를 위해 "다 이루신" 주님의 사랑을 보자. 우리의 병고, 나약함, 비겁함, 아픔과 죄악이 저 십자가에 달렸다. 십자가를 보며 나의 죄악에 죽을 때 우리도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여,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가 사는"(갈라 2, 20) 새 삶이 시작될 것이다. "보라 십자나무. 여기 세상 구원이 달렸네. 모두 와서 경배하세."
[출처] 말씀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