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수난 성지주일 다해
본문
주님 수난 성지주일 다해(루카 수난기) - 누가 예수님을 죽였나?
사순절의 마지막 주간이 시작되었다.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기념하고 재현하는 이 성주간은 파스카의 신비, 구원의 신비, 삶과 죽음의 신비로 가득 차 있다. 신비는 참여해야 깨닫는다. 수난기에 참여하여 그 안에서 내 모습을 발견할 때 우리는 수난과 부활의 신비에도 참여하게 된다. 등장인물 가운데 특히 대중 속에서 우리 모습을 살펴보자.
예수님을 고발한 사람들은 누구인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 빨마가지를 손에 들고 길에 옷을 깔면서 예수님을 왕으로 환영하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예수를 죽이라고 소리친다. 왜 이렇게 모순된 모습을 보일까? 군중들은 자신들의 목적 때문에 예수님을 기다렸다. 그들은 빵을 원했고, 병이 낫기를 원했고, 세상살이가 편안하기를 바라서 예수님을 기다렸다. 처음에는 그 기대를 채워주시는 듯 보이던 예수님은 날이 갈수록 기대와 달라졌다. 군중은 편안한 무지갯빛 인생을 원했는데, 주님께서는 희생과 용서의 십자가를 지라고 하셨다. 그들은 예수님에게 덕을 보려고 했는데, 예수님께서는 덕을 베풀라고 하셨다. 기대가 깨어진 군중은 배신감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친다.
쉬는 교우들을 만나 왜 쉬냐고 물으면, 성당에 다녀도 달라지는 게 없더라고 말하곤 한다. 성당에 나올 때 사업의 번창이든지, 건강의 회복이든지, 가정의 평화 등을 기대하였는데 그 기대가 채워지지 않으니 등을 돌린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되어야 하느님이든 신앙이든 의미가 있다고 여긴 결과다. 우리도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고, 내가 원하는 방법대로 따라주지 않는다고 상대방을 미워하고 원망하고 험담하고 분노하고 증오하고 있지 않는가? 자신이 만들어 놓은 잣대로 타인에게 나의 기대치를 투사하고, 그 결과에 따라 사람들을 평가하고 단죄한다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는 군중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예수님을 때리고 조롱한 사람들은 누구인가? 빌라도의 군사들과 헤로데의 종들이었다. 늘 천대받던 사람들, 모욕을 당하는데 익숙해진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이 자기보다 못한 사람 하나를 손아귀에 넣자, 인간의 비참한 본성이 폭로된다. 무시당하거나 매 맞던 이들이 자기보다 약한 사람에게 울분을 쏟아 놓는다. 그들의 인생은 쓰라리고 무겁기만 할 뿐 희망도, 기쁨도 없다. 그들은 느낀 대로 즉흥적인 의사 표시를 한다. 악의나 사악함 때문만은 아니다. 마땅치 않은 신세로 살아야 하는 고통과 괴로움이 희생양 예수님을 향해 터져 나온 것이다.
이들에게 예수님은 어떤 반응을 보이시는가? 침묵으로 대하신다. 한없이 나약한 모습으로 그들의 천박함과 잔학함에 당신을 내어 맡기신다. 어째서 그토록 나약하실까? 하느님은 연약하심을 통해 구원을 이루신다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다. 하느님께서 나약한 분으로 드러난다는 사실을 우리로서는 이해하기 힘들다. 그러나 하느님의 능력은 약함 가운데 드러나는 진리가 구원의 역사 전체를 관통한다. 아흔아홉에 아들을 본 아브라함, 아버지를 속이고 장자권을 탈취한 야곱, 종으로 팔려간 요셉, 말을 할 줄 모르던 모세, 볼이 붉은 소년 다윗 등, 또한 예수님의 족보에 등장하는 이방인 여자들, 근친상간에 불륜에 창녀 등, 결정적으로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 등 무력하고 나약한 사람들을 통해서 하느님은 구원을 이루신다. 같은 맥락에서 첫 독서는 "매질을 당하고 수염을 뜯기는" 모욕과 수모를 당하는 하느님의 종 모습을 전한다. 하느님의 약하심의 신비, 그것이 십자가의 신비다.
예수님은 나약하기 그지없는 상태의 십자가 상에서 큰 유혹을 받으신다. 구경꾼들은 "네가 유다인들의 임금이라면 너 자신이나 구원해 보아라."라고 조롱하고, 십자가에 같이 매달린 죄수까지 나서서 "당신은 메시아가 아니시오? 당신 자신과 우리를 구원해 보시오."라고 빈정댄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내려오시면 모두가 당신을 믿어 줄 것이다. 하지만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죽음을 받아들이는 하느님은 없어진다. 십자가에서 내려오신다면 전능하신 하느님, 언제나 성공을 거두고, 항상 자신의 야망을 채워주는 하느님상을 분명히 보여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바로 이런 힘센 하느님, 승리하는 하느님 상을 타파하기 위해서였다. 수난 복음은 자비로우신 하느님, 인간을 섬기시는 하느님, 인간을 사랑하셔서 당신을 비우시고, 당신 목숨을 바치시는 하느님을 선포한다. 힘센 것을 추구하는 이들은 나약한 하느님을 받아들이기 어렵다. 예수님의 죽음 앞에 제자들이 도망친 것도 하느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시어 나약한 모습으로 목숨을 바친다는 새로운 신관, 혁명적인 가르침을 받아들이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너의 위력, 지배력, 통치력을 과시하여 네 몸이나 구해보라'라는 사람들의 빈정거림은, 힘세고 지배하는 하느님을 그린 과거의 신관으로 나약하고 겸손한 하느님을 전한 복음의 신관을 빼앗아 버리려는 유혹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타인을 섬기는 능력을 드러내시려 오셨다. 새로운 신관을 하도 믿기가 힘들었기 때문에 이를 증명해 보이시기 위해서 당신의 몸으로, 당신의 살로, 십자가로 하느님을 표현하는 수밖에 없었다. 바로 여기에 복음의 핵심이 있고, 성체성사, 빵이 되신 그리스도의 모습이 담겨있다. 예수님의 새로운 신관을 받아들이면 인생이 전적으로 달라진다. 그것이 신앙의 참 모습이다. 우리도 나 이외의 다른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자신을 비우고 자신을 내어주는 사람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실상 우리가 새로운 하느님 상에 저항하는 이유는 만약 순수하게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였다가는 우리의 생활 방식을 완전히 바꾸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C. M. Martini)
사랑이라는 말이 이 모든 진리를 수렴한다. 여러 가지로 쓰이는 사랑이라는 말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에게서 참 의미가 드러난다. 예수께서 얼마나 철저히 자신을 포기하며 우리를 사랑하시는지 둘째 독서는 전한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셨다
[출처] 말씀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