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5주일 다해
본문
사순 제5주일 다해 -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복음에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간음하다 현장에서 발각된 여인을 끌고 와서 예수님의 판결을 요구한다. 모세법은 그와 같은 죄를 지으면 "사형을 받아야 한다"고 규정했다(레위 20, 10). 예수님을 음해하려는 함정이다. 예수님이 율법대로 사형을 선고하면 용서와 자비를 가르친 평소 말씀과는 상반되는 모순에 빠지고, 죄인을 용서하면 율법 위반으로 고발당한다.
한쪽에는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노려보는 사람들이 있고, 다른 쪽에는 예수님의 말 한마디에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초라한 여인이 서있는 모순 투성이에 사면초가 상황이다.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현실로 보인다. 남들의 잘못을 보면 고발하는 바리사이들처럼 험담하기 바쁘고, 복음의 여인처럼 잘못이 들통나면 사방에서 공격하는 사람들 틈에 숨이 막힐 듯 부끄럽고, 그 와중에 어찌할 바를 몰라 주저앉기도 한다.
바리사이들은 왜 여자를 고발했을까? 우리는 왜 남의 잘못을 두고 험담할까? 남의 잘못을 지적하고 책망하며 단죄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남이 저지른 잘못을 자신도 범하고 싶은 그림자가 있다고 한다. 잘난 사람을 흉보는 마음에는 잘나고 싶은 그림자가 숨겨있고, 못난 사람을 험담하는 마음속에는 못난 자신을 책망하는 그림자가 있다. 간음한 이웃을 입에 거품 물고 고발하는 사람의 마음속에는 간음하고 싶은 그림자가 숨어있다는 말이다. 죄를 지어도 묵인하자는 말이 아니다. 남의 죄를 물고 늘어져 절대로 용서 못 할 인간으로 만들어 모욕과 수치를 주려는 어두운 그림자, 자신과 타인을 파멸과 죽음으로 이끄는 뒤틀린 인간성이 문제다.
고발당한 여자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부끄러움 때문에 숨이 넘어갈 지경 아니었을까? 그 상황을 벗어나더라도 수치심 속에서 평생을 비참하게 지낼 처지였으리라. 잘못을 뉘우치는 수치심이 해롭지는 않다. 그러나 잘못에 대한 수치심을 넘어서서, 자신의 존재 자체를 부끄러워하고 부정하는 해악적 수치심은 문제다. '죄를 지은 나'라는 존재는 도무지 개선의 여지가 없기에 이 세상에 존재할 가치가 없다고 느끼는 수치심은 인간이 스스로에게 가하는 가장 큰 폭력이다. 자신이든 타인이든 죄를 지었으니 벌을 받아야 하고, 잘못을 했으니 비참하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용서와 자비, 희망과 사랑의 하느님을 믿지 못하게 된다.
고발하는 이들과 죄지은 여인 사이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없이 "몸을 굽혀 땅에 무엇인가 쓰셨다." 시기와 위선 가득한 고발자들, 비인도적이고 몰염치한 세상 앞에서 침묵하신다. 침묵 가운데 내면 깊은 곳에서 하느님을 만나시는 장면으로 다가온다. 침묵을 지키던 예수께서 몸을 일으켜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라고 말씀하신다. 죄인에게 손가락질하기 전에 죄인을 고발하는 자기 자신부터 살펴보라는 말씀이다. 이 말씀으로 예수님께서는 상황을 완전히 뒤엎으신다. 자신의 모습을 돌아볼 때 하느님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있겠는가? 말씀을 듣고 나이 많은 사람부터 떠나갔다고 한다. 세상을 오래 살수록 죄가 더 쌓였기 때문일까? 자기 자신이 죄인인데 어떻게 남을 단죄할 것인가? 남이 아닌 자신의 어둠을 보며 자신이야말로 참으로 자비가 필요한 존재임을 깨닫는 데서 단죄와 고발로 상처받고 상처 입히는 악순환을 넘어서는 길이 열린다. 타인의 잘못만 보고 있는 한 손에 든 돌을 내려놓을 수 없다. 남 흉보는 눈길을 자신에게 돌려 흉보던 그 사람보다 내가 나을 것이 없고, 남에게 돌을 던지려는 자신이 바로 돌을 맞을 존재임을 깨달을 때 내 손에 움켜쥔 돌을 내려놓게 된다.
모든 사람이 떠나가고 여인과 예수님만 남았다. 죄의 문제는 다른 사람이 끼어들지 말고 주님과 당사자가 해결할 사안임을 암시하는 장면이다. 예수께서는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라고 말씀하신다. 죄에 따르는 벌에서 여인을 해방하시는 말씀이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이 장면을 "비참(miseria)과 자비(misericordia)의 만남"이라고 주석했다. 여인의 비참 - 인간의 수치심과, 하느님의 자비 - 예수님의 용서가 만나는 장면이다. 간음만 죄는 아니다. 우리를 비참하게 만드는 모든 것이 죄다. 단죄는 인간을 죄의 비참함 속에 질식시키지만, 용서는 죄로부터 다시 일어나게 한다. 그것이 서로 고발하고 고발당하는 부조리한 세상을 벗어나게 하는 진리였다. 예수께서는 적선하듯 죄를 눈감아준 것이 아니다. 먼저 사람들이 자신의 내면을 보게 하시고, 자신 안에 있는 죄를 극복하고 그래서 온전히 새로운 삶을 시작하도록 용서하셨다.
"예전의 일들을 기억하지 말고, 옛날의 일들을 생각하지 마라. 내가 새 일을 하려 한다." 첫 독서 이사야서의 말씀처럼 지난날의 잘못 들을 기억에서 지우고, 흘러간 일에 마음이 묶이지 않으려면 모든 죄가 씻겨져야 한다. 어떻게 죄가 씻겨질까? 여인의 죄와 돌 던지는 고발자들의 죄가 어떻게 씻겨질 수 있을까? 고발자들의 돌을 주님께서 대신 맞으시고 여인의 죄를 대신 지고 죽으신다. "그는 우리의 병고를 메고 갔으며 우리의 고통을 짊어졌다."(이사야 53, 4) 이로써 인과 응보의 사슬이 끊어진다.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상의 수난과 죽으심과 부활로 우리 죄를 씻으신다.
너나 나나 다 죄인이니 어쩔 수 없다는 체념으로는 삶이 새로워지지 않는다. 모든 죄를 덮어두자는 형식적인 사면 역시 우리 삶을 바꾸지 못한다. 새로운 미래가 열리는 길은 예수님과의 만남에서 비롯된다. 복음 말씀이 주님을 만나라는 초대로 다가온다. 깊은 침묵 후에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으라는 초대다. 여인이 맞을 돌을 대신 맞으며 십자가에서 목숨을 내어 주신 사랑을 보라는 초대다. 그 수난과 죽음에 우리도 참여하여 부활의 새 생명을 누리라는 초대다. 그 심정을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토로한다.
"나는 죽음을 겪으시는 그분을 닮아, 그분과 그분 부활의 힘을 알고 그분 고난에 동참하는 법을 알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어떻게든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살아나는 부활에 이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제2독서)
[출처] 말씀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