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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길 회헌 47조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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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제4주일 다해

작성자 : 말씀의성모영보수녀회   작성일: 22-03-28 09:39   조회: 4,381회

본문


사순 제4주일 다해 -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

 
부활의 기쁨을 미리 맛보는 사순 제4주일이다. 회개를 강조하여 ‘돌아온 탕자의 비유’, 비유의 메시지를 강조하여 '인자한 아버지의 비유', 혹은 비유에 등장하는 두 형제가 인간을 대변하기에 '두 형제의 비유'라고 부르는 이야기를 복음에서 들었다. "두 형제"라는 설정은 성경에서 카인과 아벨 이래 이스마엘과 이사악, 에사우와 야곱, 야곱의 열한 아들과 요셉, 예수님 시대의 세리와 바리사이, 죄인과 율법학자 등 신 구약을 관통하는 소재다. 사람 안에는 작은아들과 큰아들이 모두 들어 있기에 비유 말씀은 선과 악이 공존하는 인간 내면의 양면성, 우리 자신의 이중성을 암시한다.

​"아버지, 재산 가운데에서 저에게 돌아올 몫을 주십시오." 발단은 작은아들의 유산상속 요구였다. '유산'이란 용어는 본디 '‘아버지의 삶 patrimonium’이란 뜻을 지닌다. 유다 전통에서 유산의 상속은 부친의 사후에 시행하였다. 생전에 유산을 청구하는 행위는 아버지를 죽은 자 취급하는 짓이다. 부자관계를 끊어버리려는 아들의 요구를 아버지는 말없이 들어주신다. 자식이 잘못될 가능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들의 선택을 존중해 준다. 하느님께서는 그렇게 인간에게 당신의 유산을, 생명과 자유를 내어주신다.

​유산을 받은 작은아들은 "먼 고장"으로 떠난다. 아버지의 세계에서 멀어짐은 하느님의 세계에서, 하느님께서 주신 본래의 모습에서 멀어짐을 상징한다. 그리고 "재산"을 탕진한다. 재산이란 용어는 그리스어로 "본질"을 의미한다. 자신만을 위해 하느님을 떠난 삶은 인간의 본질을 탕진하고, 자신의 근본을 잊어버리게 한다. 하느님께서 주신 자유를 남용한 결과는 돼지 먹이로도 연명이 힘든 인간성의 추락이었다. 성경에서 돼지는 불결함의 상징, 곧 인간성을 상실한 모습이다.

​작은아들은 그제서야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지" 하는 결심을 한다. 인간이 견디기 힘든 어려움에 처하면 근본을 생각하게 된다. 이스라엘 백성이 나라가 망하고 유배를 당한 후에 신앙을 되찾듯, 자유로웠던 인간에서 불결한 가축인 돼지만도 못하게 되자 작은아들의 전환이 시작된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라고 고백할 결심을 한다. 죄와 참회의 본질을 드러내는 고백이다. 죄는 유산을 탕진하거나 창녀들과 어울린 것 이전에 아버지로부터 멀어진 것이 본질이다. 즉 인격적 관계의 손상이 죄의 본질이고, 참회는 단순한 죄목의 나열이 아니라 인격적 관계의 회복이 그 핵심이다.

​아버지는 자신을 죽은 자로 간주하며 떠난 아들을 어떻게 대했을까? 아버지는 "집으로 돌아오는 아들을 멀리서 보고 달려가, 그 아들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다." 아버지를 한자어로 부친(父親)이라고 한다. 여기서 '친할 친, 어버이 친(親)'자는, '나무(木) 위에 서서(立) 무언가를 바라본다(見)'는 뜻을 담고 있다. 복음의 아버지 모습과 흡사하다. 아버지는 매일, 나무처럼 높은 데서 목을 길게 빼고 기다리신다. 무엇을 기다렸을까? 작은아들의 금의환향이 아니라 아들 자체를 기다리신다. 하느님께서는 그렇게 조건 없이 우리를 기다리신다. 우리의 성공이나 착함, 건강함, 명예가 문제가 아니다. 있는 그대로의 우리 자신을 기다리신다.

​작은아들은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라고 말씀드리려는 결심을 하고 돌아왔다. 그러나 아버지는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라는 말까지만 듣는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라는 뒤의 말을 듣지 않으신다. 아버지에게는 방탕하든 성실하든 아들은 아들일 뿐, 품팔이꾼일 수 없기 때문이다.

​'나에게 아버지는 죽었으니 유산을 달라, 당신은 나와 상관없는 존재'라며 품을 떠난 아들이 돌아옴으로, 당신을 살아있는 아버지로 인정하였다. 그래서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라며 기뻐한다. 이어서 아들에게 새 옷을 입히고 가락지를 끼워 주시고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베푸신다. 새 옷은 인간이 본래 입었던 은총을, 가락지는 한 인격체의 서명을 대신하는 도장이므로 본래의 인간 품위의 회복을, 잔치는 성체성사를 상징하는 것으로 교부들은 해석하였다.

​이에 큰아들의 거친 항의가 뒤따른다. 큰아들의 눈에는 아우의 고난이나 회개를 통한 인간성 회복은 보이지 않고 아버지의 불공평한 처사만 보인다. 왜 그럴까? 큰아들은 무의식중에 자신이 가지 않은 방탕의 길을 경험하고 돌아온 동생에 대한 질투를 하기 때문이다. 인생에서 큰 시련 없이 하느님과 조화로운 관계 속에서 성실하고 정직하게 살며 타락해 보지 않은 이들도 내심으론 방탕을 꿈꾼다고 한다. 이들은 자유의 가치를 체험하지 못하고 고통을 통한 성숙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아버지의 집에 머무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지 그 은총의 가치도 느끼지 못할 수 있다(J. 그닐카). 이러한 큰아들에게 아버지는 책임을 묻지 않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라고 하시며 아들의 모든 것을 받아주고 당신의 모든 것을 내어 주신다.

​아버지의 모습을 다시 보자. 하느님을 떠난 책임을 묻지도 않고, 죄악에 빠진 벌을 주시지도 않는 아버지의 모습은 정의를 넘어서는 자비가 하느님의 본성임을 드러낸다. 어떻게 그러실 수 있을까? “예수님은 인류 역사상 ‘죄인을 사랑하는 하느님’을 가르치신 유일무이한 분”(H. 큉)이시기 때문이다. 모든 종교는 ‘죄인을 벌하는 신(神)’을 주장하지만, 오직 예수님만이 ‘죄인들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가르치셨다. 그분께서 우리의 아버지 하느님이시다.

​아버지께 중요한 것은 아들 자체다. 큰 아들의 성실성이나 작은아들의 방탕, 큰 아들의 교만과 질투나 작은아들의 범행 등은 부차적이다. 두 아들 모두를 품으시는 아버지는 삶의 빛과 어두움, 갈망과 부끄러움, 죄와 교만 모두를 품어 주시는 우리의 하느님이시다. 전염병에, 전쟁에 우리가 사는 세상은 불안하고 사람들은 방황하며 삶은 허무하지만, 주님 안에서는 모든 것이 새로워질 수 있다. 그러기에 일어나 그 아버지께 돌아가자고, 아버지의 자녀로 새로 시작하자고 말씀은 우리를 초대한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과 화해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해의 직분을 맡기신 하느님에게서 옵니다."(제2독서)


[출처] 말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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