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제4주일 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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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제4주일 다해 -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착한 목자 주일인 오늘, 예수님은 "나(착한 목자인 예수님)는 그들(양떼인 우리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라고 말씀하신다. 성경에서 "안다"는 것은 단순히 어떤 사실에 관한 정보를 가졌다는 뜻을 넘어서서 '내적으로 받아들인다'라는 의미다. 주님께서 나를 아신다는 말씀은 주님께서는 내가 어떻든 나를 받아들이신다는 말씀이다. 나를 아시는 주님의 목소리를 나도 알아듣고, 나를 받아들이시는 주님을 내가 목자로 따를 때, 주님과 우리는 하나가 된다. 영원히 살아계신 주님과 하나가 되면 우리도 "영원한 생명을" 누린다.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고 이르신다.
주님께서는 왜 우리를 아실까? 하느님께 우리가 귀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얼마나 귀한 지 "하느님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두셨다."(루카 12,7)고 주님께서 이르셨다.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도 다 아신다(마태 6,8 참조). "정녕 당신께서는 제 속을 만드시고 제 어머니 뱃속에서 저를 엮으셨습니다." (139, 13)라고, 탄생 이전부터 나를 아신다고 시편은 고백한다. 자기도 모르는 자신의 의지를 따라 사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나보다 더 잘 나를 아시는 주님을 따름이 생명을 누리는 길이다. 주님의 목소리를 듣고 따르는 이들은 "영원토록 멸망하지 않을 것이고, 또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라고 예수님께서 선언하신다.
우리를 아시는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신다. 그 부르심(성소)이 우리를 우리 자신이 되게 한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김춘수, 꽃)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저 다만 하나의 몸짓, 익명의 생물에 불과하지만, 이름을 불러줄 때 꽃이 되고 잊혀지지 않는 의미가 되듯,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가 그분의 부르심을 들으면 불러 주신 주님과 부름받은 우리는 새로운 관계에 들어간다. 주님께서 내 이름을 부르심으로 이제 나로 하여금 꽃보다도 더 소중한 존재, 결코 잊혀지지 않는 존재, 곧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참으로 놀라운 소식이다.
나를 부르시는 주님을 따르기 위해 먼저 그분의 음성을 알아들어야 한다. 주님께서는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라고 이르신다. 성경에서 "듣는다"는 것은 한 귀로 흘려듣는 것이 아니라 주의 깊게 듣고, 마음속에 간직하여 묵상하는 자세를 말한다.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루카 2, 19)라고 전하는 마리아의 모습이 이를 대변한다. 더 나아가 '듣는 것'은 말은 '말하는 이가 누구인지 아는 것'이다. 우리를 부르신 목소리의 주인이 예수님임을 아는 것이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는 말씀에 담긴 뜻이다. 그리하여 '들음'은 '따름'으로 발전한다. 그러기에 주님은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라고 말씀하신다.
주님의 목소리를 알아듣기 위해, 주님의 말씀에 마음을 열고 말씀에 따라 살기 위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 거리든 집안이든 온갖 소리로 가득 찬 세상이다. 이 소음 속에서 어떻게 목자의 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교부들을 비롯하여 하느님을 체험한 영적 스승들은 한결같이 하느님께서 침묵 가운데 말씀하신다고 증언한다. "하느님의 언어는 침묵이다"(Rumi). 마더 테레사는 "하느님께서는 마음의 침묵 안에서 말씀하십니다. 기도하는 영혼은 깊이 침묵하는 영혼입니다. 우리 자신이 내적, 외적 침묵을 실천하지 않고서는 감히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침묵은 모든 것을 새로운 시각으로 보게 합니다. 바로 거기. 침묵 속에서만 우리는 그분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대의 마음이 다른 것들로 가득 차 있다면 그대는 하느님의 그 음성을 들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침묵 속에 들으십시오."라고 일러준다.
하느님의 음성은 신체적 귀가 아니라 내면의 침묵 가운데 알아듣기 때문에 하느님의 언어는 침묵이다. 세상 한복판에서 주님의 목소리를 알아들으려면 자기 밖의 소음에서 벗어날 고요한 시간과 공간이 필요하다. 자기 안에서 올라오는 각종 소음으로부터 해방이 필요하다. 자신의 내면에서 올라오는 마음의 소리에 일일이 반응하여 걱정하고 화를 내고 두려워하면 주님의 음성을 듣기는 어렵다. 자기 밖에 들리는 세상 소문과 해결책도 없는 걱정거리에 마음이 흔들리는 상태에서 주님의 음성은 들리지 않는다. 목자의 음성을 듣지 못하면 목자를 따라가지 못한다.
실제로 믿는 이들 모두가 주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지는 않는다. 주님 음성을 귀로는 듣지만 마음으로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기 내면에서 올라오는 분심과 걱정거리에 분주하고, 자기 밖의 소문에 시달리다 보니 주님의 부르심을 알아듣지 못하거나 듣기는 하더라도 받아들여서 따르지 못한다. 신앙이 자라나지 못하는 이들은 대개 자신들의 사고방식과 자신들이 지키려는 가치를 기준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들은 자신의 기준에 들어오지 않는 말씀은 외면한다. 자신이 양이 아니라 목자로 살겠다는 태도다. 자신이 목자 노릇을 하게 되면 주님이 필요 없기에 주님의 음성을 알아듣지 못하고, 안타깝게도 영원한 생명의 초대를 놓쳐버린다.
착한 목자 주일인 오늘, 주님께서는 목자의 부르심을 알아듣고 따르는 양이 되라고 우리를 초대하신다. 내면의 걱정과 외부의 소음에서 벗어나 침묵 가운데 주님 앞에 머무르며 말씀에 귀를 기울이자. 나를 다 아시고 부르시며 모두 받아주시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따를 때, 둘째 독서에서 들었듯, 주님께서는 "목자처럼 그들을 돌보시고, 생명의 샘으로 그들을 이끌어 주실 것이며,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출처] 말씀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