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6주일 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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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6주일 다해 - 발치에 않아 그분의 말씀을 들으며
오늘 듣는 성경 말씀은 공통적으로 손님 대접 이야기다. 손님을 환대하는 태도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적 덕목으로 장려된다. 신앙인에게 손님 대접은 인간적 덕목을 넘어서서 '하느님과 만나는 신비'로 드러난다. 첫 독서에서 아브라함은 길손을 맞아 발을 씻겨주고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베푼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대접한 손님은 하느님의 사자였고, 환대를 받고 나서 놀라운 선물을 주신다. 아흔아홉 살 아브라함에게 "아들이 있을 것"을 약속하신다. 손님으로 환대를 받으신 주님께서 역으로 인간을 환대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나그네, 가난한 이, 굶주린 이등 가장 보잘것없는 이에게 해 준 것이 모두 당신을 대접한 것(마태 25,35-40)이고, 그렇게 주님을 환대한 이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으로 갈 것"이라고 최후 심판의 기준을 말씀하셨다.
우리를 찾는 손님은 단순한 길손이 아니라 하느님의 표지이므로, 환대는 그 사람 안에 계신 하느님을 대접하는 신앙행위다. 타인을 환대하기 위해서는 타인에게 자신을 열어야 한다. 집의 문뿐 아니라 마음의 문도 열어야 진정한 환대가 이루어진다. 이는 이기적 자아를 탈피하여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는 신앙의 여정을 상징한다. 아브라함처럼 우리가 마음을 열고 손님을 환대할 때 주님은 아브라함에게 하셨듯 우리를 대접하신다. 손님이 주님이 되고, 주님을 대접한 내가 손님으로 주님의 대접을 받는 이러한 상호 작용을 거쳐 주님과 우리가 하나가 됨이 환대가 지닌 신앙의 신비다.
어떻게 대접해야 손님을 잘 대접할까? 복음은 마르타와 마리아가 예수님을 환대하는 모습을 전한다. 두 자매가 주님을 대접하는 태도는 상반된다. 마르타는 갖가지 시중을 들며 분주히 주님을 대접하였고, 마리아는 조용히 발치에서 주님의 말씀을 듣기만 한다. 분주히 일하던 마르타가 동생도 자기를 도와 일을 하기를 바라자, 예수님께서는 의외로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라며 칭찬하신다. 주님을 위해 분주히 시중을 들기보다 말씀을 귀 기울여 듣는 모습이 주님께서 반기시는 환대라는 말씀인데, 어찌하여 마리아의 선택이 더 좋은 몫일까?
마르타와 마리아가 대접하던 예수님은 누구이신가? 말씀이 사람이 되신 분이시다.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라고 하늘에서 땅으로 인간을 찾아오신 분에게, 말씀을 들음보다 더 귀한 환대는 없다. 말씀을 들음이 참으로 좋은 몫인 까닭은 주님 말씀을 들을 때 주님이 우리를 환대하시기 때문이다. 예수님 발치에서 말씀을 들으면 주님을 받아들이게 되고, 동시에 주님께 우리가 받아들여진다. 주님의 발치에서 말씀을 들을 때, 주님은 우리의 이야기들, 탄원과 감사, 희망과 노고를 다 들어주시고 받아주신다. 더 나아가 주님은 우리의 발을 씻겨 주신다. 끝내는 송아지를 잡는 대신 당신의 살과 피를 주신다. 그러기에 주님 발치에서 말씀을 듣는 몫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참으로 좋은 몫이다. 주님 앞에서 마리아의 듣는 모습을 두고 예수님은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라고 말씀하신다. 진정한 환대이자 예수님의 제자로서 꼭 필요한 태도가 말씀을 들음이라는 의미로 들린다.
꼭 필요한 한 가지로, 마리아가 택한 좋은 몫인 말씀을 들음과 관련하여, 바오로 사도는 "말씀은 과거의 모든 시대와 세대에 감추어져 있던 신비입니다. 그런데 그 신비가 이제는 하느님의 성도들에게 명백히 드러났습니다. ... 그 신비는 여러분 가운데에 계신 그리스도이시고, 그리스도는 영광의 희망이십니다."라고 둘째 독서에서 힘주어 선포한다. 동서고금을 통해 현인들이 찾아 헤맨 "신비는 우리 가운데 계신 그리스도"이시다. 주님 대하듯 타인을 대하는 환대는 우리 가운데 계신 그리스도를 드러낸다.
열심히 벌어서 자녀들을 가르치며 노부모 뒷바라지를 하는데도 행복하지 않은 경우가 있다. 부모는 자식에게 힘들여 공부시키는데 어찌 품행이 이 모양이냐고 걱정이고, 자녀는 부모에게 내 마음을 왜 몰라주냐고 원망이다. 아내는 아침부터 전화기에 매달려 남편 원망하는 수다에 빠지고, 남편은 일에 지친 몸을 술로 달랜다. 노인들은 홀로 서러워한다. 무엇이 이 불화의 원인일까? 서로가 서로의 말을 들어주지 않는 상황이 불화의 출발점이다. 마리아가 택한 좋은 몫인 경청 즉 상대방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임이 먼저 필요하다. 힘들고 지쳤더라도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따뜻한 대화가 있으면 거기 그리스도께서 함께 계시고, 아무리 재산이 넉넉하더라도 서로의 사정을 들어주는 인간적인 대화가 없다면 그리스도가 계시지 않기에 가정은 일에 지친 노동자 숙소가 될 것이다.
교황님의 지향에 따라 오늘날 온 가톨릭교회가 전념하고 있는 ‘시노달리타스(synodalitas)’는 듣는 교회, 경청하는 교회로의 전환을 뜻한다. 경청은 대화이며 동시에 읽기이다. 경청은 상호 간의 인격적 대화이며 세상을 신앙의 눈으로 읽는 일이다. 마음을 열고 듣는 가운데 성령의 이끄심을 체험하는 경청과 식별이 오늘날 위기에 처한 교회가 가야 할 길로 교황님은 강조하신다.
경청, 듣는 마음을 배우기 위해 좋은 몫을 택한 마리아의 모습을 다시 본다.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않아 그분의 말씀을 듣는다." "발치"가 어딘가? 아래쪽, 낮은 곳이다. 큰소리치는 높은 곳이 아니라 낮아진 겸손함에서 말씀이 들리기 시작한다는 뜻 아닐까? 진리의 말씀, 사랑의 속삭임, 평화의 위로는 낮아질 때 들린다.
행실이 나쁘다고 자식을 걱정하기 앞서 내려간 마음으로 자식의 힘들어하는 이야기를 듣고, 살림을 못한다고 큰소리치기 전에 낮은 자세로 상대의 허전한 마음 소리를 듣고, 능력이 안 된다고 탓하기보다 상대의 피로와 좌절을 발치에서 듣자. 그 속에 주님의 말씀이 담겨 있을 것이다. 사랑으로 부르시는 음성, 다시 일어나라고 용기와 위로를 주시는 속삭임, 주님만이 전해주시는 평화의 말씀이 들리기 시작한다. 그렇게 말씀을 들을 때, 말씀이신 주님이 주시는 좋은 몫,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시는 좋은 몫, 너무도 소중하기에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을 주님의 사랑이 우리를 환대한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우리 가운데 계시게 되고, 그분이 우리의 희망이시다.
"말씀은 과거의 모든 시대와 세대에 감추어져 있던 신비입니다. .... 그 신비는 여러분 가운데에 계신 그리스도이시고, 그리스도는 영광의 희망이십니다."
[출처] 말씀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