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5주일 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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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5주일 가해 –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유명한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복음에서 듣는다. 예수님을 시험하려는 율법학자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느냐고 질문한다. 예수님은 율법의 가르침을 되묻고, 그가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율법의 핵심을 대답하자, "그렇게 하여라."라고 실천을 명하신다. 이 말씀에, 율법교사가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라고 따진다. 그러자 예수님은 강도를 당한 사람을 도와준 사마리아 사람 이야기를 들려주시며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하고 거듭 실천을 명하신다. 사랑은 토론이 아니라 실천으로 드러남을 일깨우신다.
교부들은 예수님의 이 비유를 인간 역사로 해석하였다. 강도를 만나 가진 것을 뺏기고 초주검이 되어 길가에 쓰러진 존재는 소외된 인간의 상징이다. 역사상 힘없는 사람들은 강도질을 당하듯 짓밟히고 이용당하며 살아왔고, 힘 있는 사람들은 자신만 살겠다고 다른 사람을 이용하고 빼앗고 억압했다. 결국 인간은 강도질 당한 사람이자 동시에 강도이기도 하다. 사건이 벌어진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가는 길은 세계사를 상징하고, 이 길에서 초주검이 된 사람은 인류를 상징한다는 해석이다.
성경의 비유는 단순한 옛날이야기가 아니고 지금의 현실을 반영한다. 인류의 역사뿐 아니라 개인의 삶에서도 인간은 강도를 만난 듯 위태로운 지경에서 도움을 청했다가 외면당하기도 하고, 강도처럼 내가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며 이웃을 해치기도 하고, 혹은 레위나 사제처럼 어려운 사람을 외면하며 살아간다. 진리를 알면서도 거짓과 타협해야 하고, 재물이 모든 것이 아니라면서도 돈의 위력에 매여 살고, 도와주어야 할 사람을 보면서도 가족 걱정에 외면하고, 전화 한 통이면 위로가 되는 친구나 가족에게 바쁘다고 미루는 때가 한두 번이던가? 그렇게 살아가는 우리가 강도이자 강도 만난 사람, 레위이자 사제 아닐까? 문제는 이 상황에서 강도든, 강도 맞은 사람이든, 지나쳐가는 이든 누구도 행복할 수 없다는 점이다.
말씀에 따르면 이 비극적 소외 상황은 사마리아 사람에 의해 극복된다. 누가 사마리아 사람일까? 복음에서는 어려울 때 도움을 주는 사람이었다. 교부들은 사마리아 사람은 바로 예수님이라고 해석하였다. 사마리아 사람처럼 낯설고 멀리 있는 존재로 여겨지던 하느님이 세상으로 내려와 위험에 빠진 이들을 위해 목숨까지 내어놓으셨다. 제1독서에서 "하느님의 말씀은 멀리 하늘 위에, 바다 건너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입과 마음에 있다"고 일러준다. 그 하느님의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강도 맞은 인류에게 사마리아 사람처럼 다가오셨다. 그러기에 바오로 사도는 제2독서에서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이라고 전한다. 하느님의 모든 권능이 그분 안에 있기에 예수님을 보는 사람은 곧 하느님을 보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따라서 사마리아 사람처럼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우리는 예수님을 볼 수 있고, 그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게 된다.
"하루 벌어 하루 살기도 힘든 1970년 후반 무렵, 남편과 저는 젖먹이인 아들과 함께 단칸방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건강이 좋지 않았던 저는 아이에게 제대로 젖을 물리지도 못했습니다. 분유를 먹여야 했지만 보리 섞인 정부미도 봉투로 조금씩 사다가 먹는 처지여서 분유도 넉넉히 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은 일하러 나가고 혼자 집에 있을 때였습니다. 저희 집 부엌에서 부스럭대는 소리가 나더군요. 설마 이런 집에 도둑이 들까 했지만, 덜컥 겁이 나 부엌을 살폈습니다. 옆집에 사는 쌍둥이 엄마였습니다. 그런데 찬장을 뒤지더니 슬그머니 분유통을 꺼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당시 쌍둥이 엄마도 저와 마찬가지로 젖먹이를 기르고 있어 분유 때문에 쩔쩔매던 중이었습니다.
그 순간 눈이 뒤집혀, 당장 뛰쳐나가 머리채라도 휘어잡으려고 하는데, 쌍둥이 엄마는 자기가 들고 온 분유통을 조심스레 꺼내더니 우리 분유통에 분유를 덜어놓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알아보니 쌍둥이 엄마의 친정집에서 분유 한 통을 사줬는데 항상 분유 때문에 죽는소리하던 제가 기억나더랍니다. 한 통을 다 주자니 자기도 어려워서, 몰래 조금만 덜어주고 간 것이랍니다."
제 새끼 귀하지 않은 어미가 어디 있겠는가? 내 아이 먹일 분유도 모자란 상황에서 이웃집 아이에게 분유를 나눠주는 마음이 자신의 외아들을 강도 맞은 인류를 위해 내어주신 하느님 마음이다. 우리가 하느님처럼, 분유를 나눠주던 어머니처럼 가서 그렇게 할 때, 강도질하고, 강도 당한 사람을 피해 가고, 강도 짓에 초주검이 된 인류가 되살아난다.
"만일 여러분이 도움이 필요한 사람 앞에서 가엾은 마음을 느끼지 못한다면, 무엇인가 잘못된 것입니다. 주의하십시오. 조심합시다. 이기적인 무감각에 끌려다니지 맙시다. 연민을 위한 능력은 그리스도인의 시금석(試金石), 더 나아가 예수님 가르침의 시금석이 되었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우리에 대한 성부의 연민이십니다. 이웃에 대해서 사랑과 기쁨으로 행한 착한 일을 통해서 우리 신앙은 씨앗을 뿌리고 열매를 거둡니다. 삶의 마지막에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너는 예리코로 가는 길을 기억하냐? 거의 초주검이 되었던 사람이 바로 나였다.”"(마태 25, 40-45 참조) "(프란치스코 교황)
오늘 복음 말씀의 발단은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이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실천은 단순한 윤리적 권고가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받는 조건이다. 강도 맞아 넘어진 사람을 일으키고, 분유 한 스푼, 격려 한 마디로 사랑을 실천하는 일은 단순히 착하고 훌륭한 일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이다.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이다. 그런데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그러므로 사람이 사랑을 실천하면 하느님을 닮게 된다.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이르신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라는 말씀은 인간 본래의 모습인 하느님의 모습을 되찾고, 하느님의 생명인 영원한 생명을 누리라는 초대다.
[출처] 말씀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