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4주일 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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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4주일 다해 - 평화를 빕니다.
오늘 듣는 말씀은 공통적으로 평화를 전한다. 첫 독서에서 이사야는 나라가 망해 고통을 겪는 이들에게 “예루살렘에 평화를 강물처럼 끌어들이리라.”는 약속을 전한다. 둘째 독서에서 바오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따르는 모든 이들에게 평화와 자비가 내리기를 빕니다.”라고 기도한다.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견하시며 당부하신다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하고 말하여라.” 인간이면 누구나 평화를 갈망한다. 그래서 평화가 무엇인지, 평화를 얻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주장들도 많다. 그런데 예수님은 평회에 대한 상세한 가르침 이전에, 복음 선포에 나서는 제자들에게 그냥 단순히 어느 집이나, 누구에게나 평화를 빌어주라고 말씀하신다. 평화를 기원하는 것, 복을 빌어주는 축복이 기쁜 소식을 선포하는 출발점이었다.
한 인디언 추장이 손자에게 "인생은 자신의 내면에서 벌어지는 큰 싸움"이었다고 가르쳤다. 손자가 그 싸움이 어떤 싸움이냐고 묻자 추장은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 모두의 속에서 일어나는 이 싸움은 두 늑대 간의 싸움이란다. 한 마리는 악한 늑대로서 그놈이 가진 것은 분노, 질투, 슬픔, 후회, 탐욕, 거만, 회한, 열등감, 거짓, 자만심, 그리고 이기심이란다. 다른 한 마리는 좋은 늑대인데 그가 가진 것들은 평화, 기쁨, 사랑, 소망, 인내심, 평온함, 겸손, 친절, 동정심, 진실, 그리고 믿음이란다." 손자가 할아버지 추장에게 물었다. "어떤 늑대가 이기나요?" 추장은 간단하게 답하였다. "내가 먹이를 주는 놈이 이기지."
중세의 신비가 마이스터 엑크하르트는 우리 안에 성인의 씨앗과 악인의 씨앗이 함께 들어 있다고 갈파한다. 축복의 말은 사람을 변화시킨다. 복음 말씀대로 평화를 빌어주는 축복의 말을 들을 때 우리 안에 생명과 거룩함이 자라고, 반대로 저주나 위협의 말을 들을 때 죽음과 악마의 씨앗이 자란다.
20여 년 전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지존파 사건이 있었다. 6명의 범인들이 "돈 있고 빽 있는 자의 것을 빼앗고 그들을 죽인다"라는 행동 강령을 정하고 10억을 모으기 위해 사람들을 살해한 사건인데, 그 출발점을 보면 뜻밖이다. 주범은 초등학생 때 너무도 가난해서 학교서 미술시간에 크레파스 가져오라고 했지만, 준비할 수 없었다. 그냥 가는 일이 몇 차례 반복되자 담임선생님은 "그것도 못 가져오냐? 훔쳐서라도 가져오라" 고 야단쳤다고 한다. 선생님 말씀을 절대적으로 따르던 이 가난한 아이는 "훔쳐서라도 가져오라"는 말에 도둑질을 시작하였고 결국 있는 자들에 대한 증오로 엄청난 살인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한 마디의 저주가 인간 안의 악마의 씨앗을 싹 틔우고, 그 악마에게 계속 먹이를 준 결과가 희대의 살인을 부른 것이다.
유대인 출신 키릴 악셀로드라는 신부님이 계시다. 이분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듣지도 말하지도 보지도 못하는 3중 장애인이다. 십여 년 전 한국에 오셨을 때 "하느님은 왜 이런 3중 장애를 주었을까? 어떻게 살라고?"라고 기자가 질문하자, 악셀로드 신부는 이렇게 답했다. "세상은 장애와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상이 있으니 고통이 있지요. 만약 고통이 없다면 하느님도 필요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이 보낸 예수님은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갔고, 그들과 고통을 함께했습니다." 3중 장애의 고통을 절망이나 분노가 아닌 소명으로 받아들인 악셀로드 신부의 "내게 고통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라는 진심 어린 고백에 많은 이들이 감동했다.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암흑의 고통 앞에 절망이나 분노가 아니라, 감사와 소명으로 받아들인 악셀로드 신부. 그분에게서 퍼져 나오는 기쁨에 가득 찬 파안대소를 보며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행복하고 평화로울 수 있나 하는 의문이 들 정도였다. "하느님께서 제게 장애를 주신 뜻을 생각했지요. 같은 장애를 가진 이들을 도우라는 것임을 알았지요."라고 말한 그 신부님은 8개 언어로 수화를 하며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며 장애인들에게 용기와 꿈을 심어주고 있다.
어린 시절 농아가 되어 급우들의 놀림과 왕따로 고통을 겪던 우리나라의 박 민서 신부도 1997년 악셀로드 신부를 만나 큰 용기를 얻고 첫 장애인 사제가 되었다. 장애 앞에서 분노와 절망과 저주에게 먹이를 주지 않고 희망과 신뢰로 받아들여서, 자신의 고통으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이들의 환한 웃음은 평화를 빌어주면서 평화가 된 사람들의 행복한 웃음이었다.
누구에게 먹이를 줄 것인가? 같은 고통을 겪으면서도 우리 안에 분노와 좌절과 복수심에 먹이를 주면 지존파가 될 것이다. 평화와 화해와 희생에 먹이를 주면 파안 대소하며 하느님을 찬미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오늘 주님의 말씀대로 "평화를 빌어 주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 자신에게 평화의 먹이를 주는 축복이다. 모든 것이 축복의 말에 달려있다.
평화를 빌어주면 축복은 상대방뿐 아니라 내게 더 크게 다가온다. "우리가 누군가를 축복할 때 물을 먹은 새싹이 자라듯 우리의 삶 역시 성장한다. 축복은 단순히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것이 아니라 만남의 순간이다. 평화의 축복을 나누며 함께 한 그 순간 우리는 자신의 본래 모습을 깨닫고 그것을 받아들이게 된다."(레이첼 나오미 레멘) 이렇게 삶을 축복하고 서로를 섬기는 사람들은 서로가 깊은 유대 속에서 힘을 얻는다. 권태와 공허와 외로움을 극복하고 서로에게 안식처가 되고, 축복받은 자신의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 다시 느끼게 된다. 서로 인정해 주고, 격려해 주고, 축복해 주고 평화를 빌어주는 것, 그것이 세상을 새롭게 살리는 길이자 복음 선포의 출발점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르신다:"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하고 인사하여라."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기도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따르는 모든 이들에게 평화와 자비가 내리기를 빕니다."
[출처] 말씀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