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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이 세상에 정의와 평화를 가져오도록 노력한다.
(말씀의 길 회헌 47조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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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7주일 다해

작성자 : 말씀의성모영보수녀회   작성일: 22-07-24 20:04   조회: 3,902회

본문


연중 제17주일 다해 -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여라.

 
신앙인은 기도하는 사람이다. 오늘 듣는 말씀은 공통적으로 기도와 관련된 말씀이다. 첫 독서에서 소돔과 고모라의 파멸이 예고된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중재에 나선다. "혹시 그 성읍 안에 의인이 쉰 명 있다면, 그래도 쓸어버리시렵니까?" 재앙을 막아 보려는 아브라함의 간청은 45명. 40명, 30명, 20명, 10명까지 내려간다(6차례). 자신이 아니라 이웃을 위한 간청, 중재 기도의 전형이다. 한 가지 의문이 든다. 아브라함은 왜 열 명에서 머물렀을까? 의인 한 명이면 안 될까? 하느님은 "한 사람이라도 만날 수 있는지 광장마다 찾아보아라. 올바르게 행동하고 진실을 찾는 이가 있어 내가 그곳을 용서할 수 있는지 알아보아라." (예레5,1)라고 말씀하신 분이다. "아브라함의 제안이 한 명까지 내려갔다 하더라도 죄 없는 사람을 찾지 못했을 것이다. 그 죄 없는 한 사람의 역할은 바로 유일한 중재자 예수의 몫이었다."(J. Loew). 예수님이 바로 한 사람의 수난으로 많은 이의 죄를 짊어지신 분(이사 53,12 참조)이시다. 그분은 우리를 위하여 "큰 소리로 부르짖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고, 하느님께서는 그 경외심 때문에 들어주셨습니다."(히브 5, 7)라는 말씀대로 예수님은 중재 기도 자체라고 할 수 있다.

복음에서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진정한 중재자 예수님이 직접 기도를 가르쳐주신다. 그 핵심은 "아버지"라는 호칭에 담겨있다. 누가 누구에게 하는지 모르는 대화는 공허한 빈말이 된다. 기도가 하느님과의 대화라면, 대화 당사자 사이의 관계가 먼저 명료하게 정립되어야 한다. 그 관계를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와 자녀 관계로 제시하신다. 일반적으로 아버지라는 말은 생물학적 생명을 주는 사람이자, 길러 주는 사람으로, 보호와 위로의 상징이자 가부장적 권위나 전통의 힘을 상징하기도 한다.

예수님이 기도하신 “아버지”라는 호칭에는 이 모든 의미보다도 중요한 뜻이 담겨있다. “아버지”라고 말하기 위해서는 누군가 나를 “아들”로 불러줘야 한다. 예수님의 세례 때 하늘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태 3,17)라는 말씀이 들려왔다. 하느님이 예수님을 아들이라고 먼저 불렀다. 그 사실이 얼마나 중요했으면 예수님은 주님의 기도 앞에서 아버지를 여덟 번 언급하셨다. 그러므로 주님의 기도에서 아버지는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이다. 예수님께서 아버지라 부르시는 분은 예수님을 아들이라 부르시는 분이셨다. 예수님은 그 아버지를 우리에게 전달하시며, 우리를 당신 자녀 됨에 참여시키신다. "여러분은 …여러분을 자녀로 삼도록 해 주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이 성령의 힘으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성령께서 몸소,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우리의 영에게 증언해 주십니다."(로마 8, 15-16) 이제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는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가 되었다. 이것이 우리의 신원이다. 이 관계가 가장 깊게 우리의 존재를 규명한다(C. M. Martini, 쉼, 참조). 하느님은 우리를 “소중한 아들, 사랑하는 딸”로 부르시고 우리는 그분을 “아버지”라고 부른다. 이 사실이 주님의 기도의 근본 바탕이다.

이어서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라고 기도한다. 자신의 왕국이 아니라 아버지의 나라를 찾는 이 기도는 예수님이 온 생애에 실천하신 기도다. 그렇듯 우리도 아버지의 이름과 아버지의 다스리심이 내 삶에서 실현되기를 청하며 기도한다. 입으로만 외우는 기도가 아니라 삶으로 실천할 기도라고 할 수 있다. 후반부,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죄를 용서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에서 현실에서 필요한 요청을 드린다.

예수님은 친구에게 빵을 얻어내는 이야기를 통해 항구한 기도를 가르치신다. 여기서 거듭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라고 이르시며 하느님은 우리의 행복을 바라시는 아버지라는 사실을 상기시키신다.  아버지 앞에 기도하며 자신이 청하는 것이 무엇이고 왜 청하는지 되돌아봄으로써 우리가 누구인지 깨닫게 되며, 부족한 우리 자신이 정화된다. 그렇게 기도는 우리를 붙잡아주고, 일으켜 세워주고, 변화시킨다. 

주님께서 이르시는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라는 말씀은 기도가 복을 얻는 도깨비방망이라는 뜻이 아니다. 인간은 하느님에게 청할 뿐, 그 기도를 언제 어떻게 들어주실지는 전적으로  하느님 소관이다. 한국 종교계가 극복해야 할 가장 시급하고 본질적인 문제는 기복 신앙이라고 지적하는 이들이 많다. "만약 종교가 구하고 약속하는 복이 물질적인 것이라면 종교는 존재 이유를 상실할 것이다. 신앙인들이 구하는 가치가 일반인들이 구하는 가치와 똑같다면, 대한민국 사람들 모두가 신앙인이 된다 해도 우리 사회는 하나도 달라질 것이 없기 때문이다." (길희성)

하느님께서는 청원 기도를 들어주신다. 기복 신앙과 달리 청원 기도는 하느님의 영이 이 세계에 개입하시는 일로, 기적으로 드러날 수도 있다. 이는 복을 받으려는 이기적 마음에 주시는 선물이 아니라, 하느님이 우리 삶에 개입하시도록 허락하는 믿음에 응답하시는 선물이다. 비록 겨자씨처럼 작더라도 믿음으로 하느님의 다스리심을 간청하면 분명 들어주신다. 그러기에 청원 기도의 전제 조건은 하느님의 자녀로 아버지를 온전히 신뢰하는 참된 믿음이다.

한 신앙인은 이렇게 고백한다: "큰일을 이루기 위해 힘을 주십사고 기도했더니, 겸손을 배우라고 연약함을 주셨다. 많은 일을 하려고 건강을 구했는데, 가치 있는 일을 하라고 병을 주셨다. 부유해지고 싶어 기도했는데, 지혜로워지라고 가난을 주셨다. 세상 사람들의 칭찬을 받고자 성공을 구했더니, 뽐내지 말라고 실패를 주셨다. 삶을 누릴 수 있게 모든 걸 갖게 해 달라고 기도했더니, 모든 걸 누릴 수 있는 삶 그 자체를 주셨다. 구한 것 하나도 주시지 않았지만, 내 소원 모두 들어 주셨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못하는 삶이었지만, 내 맘속에 진작 표현하지 못하는 기도까지 모두 들어주셨다. 나는 가장 많은 축복을 받은 사람이다."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신 예수님은 죽으신 후 부활하셨다. 참으로 기도하는 사람은 주님처럼 자신의 뜻에서 죽고 하느님 뜻 안에서 되살아나는 사람이다. 바오로는 둘째 독서에서 이렇게 선언하신다. "여러분은 세례 때에 그리스도와 함께 묻혔고, 그리스도를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하느님의 능력에 대한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과 함께 되살아났습니다."


[출처] 말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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