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회원가입  |   로그인  |   오시는 길
우리는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이 세상에 정의와 평화를 가져오도록 노력한다.
(말씀의 길 회헌 47조 참조)
말씀의 숲
영성의 향기 말씀의 향기 수도원 풍경 세상.교회의 풍경 기도자리
말씀의 향기

연중 제28 주일 다해

작성자 : 말씀의성모영보수녀회   작성일: 22-10-10 09:59   조회: 3,561회

본문


연중 제28 주일 다해 -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첫 독서와 복음에서 나병환자가 등장한다. 나병은 전염되므로 사회에서 격리당하는 고약한 불치병이다. 복음에서 나병 환자 열 사람이 멀찍이 서서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소리친다. 예수님은 그들을 측은히 여기시어, "가서 사제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라고 이르신다. 당시 사제가 공식적으로 치유를 검증해야 정상인으로 돌아오던 구약 풍습 때문이었다. "그들이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졌다."라고 복음은 이어진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그러자 예수님이 물으신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아홉은 어디 갔을까? 성서학자들은 돌아온 이가 사마리아 사람이기에 돌아오지 않은 아홉은 유다인들로 추정한다. 유다인들은 하느님께 뽑힌 민족으로 특권을 지닌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었다. 나병 치유 역시 당연한 특권으로 생각하였기에 감사드릴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들이 자비를 베풀어 달라던 간청은 실상 자신들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기도였고, 그것이 이루어지자 주님을 잊어버리지 않았을까? 종교를 특권으로 생각하고 기도를 하느님 뜻이 아니라 자기 뜻을 이루는 수단으로 여기는 세태가 연상된다.

지금도 상황은 비슷하다. 종교는 본래 부족하고 한계 많은 자신의 모습을 깨닫고 하느님께 돌아가는 중심 이동 행위이다. 그런데 종교인이 된 것을 특권으로 착각하여 자신만이, 혹은 자신의 종교만이 구원받는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의 신앙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 자기 이익을 추구하기에, 본의든 아니든 결국 하느님이 아닌 자신을 섬기는 우상숭배에 빠지고 만다. 이들을 보면서 사람들은 "그리스도는 좋지만 그리스도교, 혹은 그리스도인들은 싫다"고 비난한다. 은연중 신앙을 '안전한 보증'으로 간주하고 기도를 자기 바람을 채우는 수단으로 삼는 태도가 복음에 등장한 감사할 줄 모르는 아홉 사람의 모습으로 보인다.

감사드리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할까? 감사하지 못하면 주님과의 관계가 단절된다. 이들에게 삶은 새로울 게 없다. 주님과 관계가 없다면 병이 나은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지금은 나병이 치유되었지만 언젠가는 다시 다른 병으로 죽어야 할 운명이 달라지지 않는다.  감사드리는 이에게는 이와 달리 주님과의 관계가 발생한다. 하느님을 찬미하며 돌아와 감사드리는 이를 살펴보자. 그에게는 생물학적 치유의 기쁨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자신에게 자비를 베푼 이를 만나 감사드리는 일이었다. 그래서 돌아와 예수님을 만나자 주님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선언하신다. 그에게는 나병 치유와 비교할 수 없는 더 큰 은총인 구원이, 새로운 삶이 열린 것이다.

어떻게 감사드릴 수 있을까? 사마리아 사람의 태도에 그 답이 있다. 그는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감사를 드렸다고 한다. 루카 복음에서 "하느님을 찬양" 하는 행위는 신적인 발현, 특히 기적을 본 사람들의 반응이다(중풍 병자 치유 5,25; 과부의 외아들 소생 7, 16; 등 굽은 여인 치유 13,13; 예리코의 소경 치유 18,43; 19, 37; 사도 3,8; 4,21). 나병이 치유된 피부만 보지 않고, 거기서 하느님의 나타나심을 보았기에 하느님을 찬양한다. 사마리아 사람은 나병이 치유된 피부를 보며, 그 너머 하느님을 본다. 예수님을 통해 나타나신 하느님을 보고 찬양하며 감사를 드렸던 것이다.

이처럼 감사는 다시 보고, 다시 아는 행위다. 그동안 피상적으로 알았던 내게 벌어진 사건들과 주변에서 일어난 사건을 다시 보고, 그 모든 관계에 숨겨진 하느님의 섭리를 발견하며 하느님을 찬양하면 감사가 일어난다. 삶에는 기쁨과 슬픔, 보람과 허전함이 공존한다. 때로는 행복하기도 하고, 때로는 나병환자들처럼 참담한 순간도 있다. 그 모든 사건을 다시 보고 그 속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발견하고 하느님을 찬양할 때 감사는 저절로 따라오기 마련이다.

미사의 다른 이름은 감사제다. 미사 때마다 감사송에서 우리는 늘 고백한다.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직역하면 '의무')요 구원의 길(원문에는 '구원의 샘')입니다." 삶의 여정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그냥 넘기지 않고 거기 담긴 하느님의 사랑을 찬미하는 감사가 우리 의무이자 구원의 샘이라는 고백이다. 그렇게 감사할 때 우리 앞에 새로운 삶이 열린다.

복음 말씀을 묵상하며 호주의 장애인 닉 부이치치(Nick Vujicic)가 생각난다. 1982년생인 닉이 태어났을 때 아버지는 아들 모습을 보고 충격으로 병실 밖으로 뛰쳐나가 구토를 했다고 한다. 두 팔과 두 다리가 없었던 것이다. 넋이 나간 엄마는 닉이 생후 4개월이 돼서야 그를 안아줬다. 닉도 자라면서 절망에 빠져 여러 차례 자살을 시도하였다. 닉은 열다섯 살 때 성경에서,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을 두고 제자들이 "누구 죄로 저 이가 눈먼 사람으로 태어났습니까" 하고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일이 저 사람에게서 드러나려고 그리된 것이다." (요한 9, 1-3)라는 말씀을 읽고 하느님이 왜 자신을 이렇게 만드셨는지 깨달았다고 한다. 즉 자신의 불구가 다른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서라고 믿게 되었다. 살아갈 이유를 다시 아는 감사의 마음은 그를 온전히 다른 사람으로 만들었다. 팔다리 없이 발가락 두 개만 있는 몸이지만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서핑을 하고 스쿠버다이빙을 한다. 노래를 작곡한 음악가이자 뮤직비디오를 찍은 가수이고 영화에 출연한 배우이기도 하다. 그는 지금은 네 아이의 아버지로, "사지 없는 인생" 모임을 이끌며 희망을 선포하며 행복하게 살고 있다.

나병환자처럼 살이 문드러지고, 손발이 없듯 무기력해 힘들어 죽고 싶은 세상살이 가운데도, 다시 보면 눈에 보이는 현상을 넘어서서 우리 가운데 계시며 우리의 외침을 들어주시는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 그분을 보고 그분을 찬양하고 그분께 돌아와 감사를 드리는 믿음은 우리를 구원으로 초대한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출처] 말씀에



 

해뜨는 마을 l 영보자애원 l 영보 정신요양원 l 천안노인종합복지관
교황청 l 바티칸 뉴스 lCBCK 한국천주교주교회의
한국 천주교 여자수도회 l 한국 천주교 주소록 l 수원교구
우. 13827 경기 과천시 문원청계길 56 말씀의성모영보수녀회
56 MunwonCheonggyegill Gwachon-si Gyeonggi-do TEL : 02-502-3166   FAX : 02-502-8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