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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길 회헌 47조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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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6주일 다해

작성자 : 말씀의성모영보수녀회   작성일: 22-09-26 09:47   조회: 3,567회

본문


연중 제26주일 다해 - 부자와 라자로


독서와 복음은 부자들에 대한 경고를 전한다. 첫 독서는 다 죽어가던 이스라엘을 하느님이 기사회생 시켜 먹고 살 만하게 되니, 재산에 의지하여 흥청대는 사람들에게 "흥청거림도 끝장나고 말리라."라는 경고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어려운 시절에는 열심히 하느님께 매달리다가, 걱정거리가 없어지면 하느님을 멀리한다. 하느님이 아닌 재산에 의지하며 더 편한 것, 더 재미있는 것을 찾다 보면 하느님의 피조물인 가난한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된다. 그것이 복음의 부자와 라자로 이야기다.

살아생전에 라자로라는 거지가 종기투성이의 몸으로 부잣집 대문간에 앉아 쓰레기로 연명하지만 부잣집 대문을 넘어서지 못한다. 죽은 뒤 저세상에서는 부자는 지옥에, 라자로는 천당에 있게 되는데 둘 사이에 "큰 구렁이 가로놓여 있어" 서로 왕래할 수 없다는 말씀이다. 비유에 등장하는 부자와 가난한 자는 구체적으로 어떤 이들일까?

비유에 등장하는 부자란 돈이 많은 사람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경제력과 무관하게 물질이 자신의 안전을 지켜준다고 생각하여 거기 매달려 자기만 생각하는 사람이 부자다. 이들은 물질에만 집착한 결과, 더불어 살게 되어있는 인간 삶의 가치를 모르고 가난한 이의 고통도 모르고 하느님의 섭리에 삶을 맡기는 신뢰를 모른다. 반면에 가난한 이들은 단순히 경제력이 없거나 질병에 시달리는 이들만이 아니다. 세상의 참 주인이 재물이 아니라 하느님이심을 알고, 주님 섭리에 모든 것을 맡기고, 하느님의 사랑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사람이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들의 것이다."(루카 6, 20)라고 말씀하셨다. 따라서 부자에서 가난한 이로 변하는 것이 행복의 길이다. 즉 자기 힘으로 세상의 재물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태도에서, 은총의 힘으로 하느님의 손길에 의지하는 삶으로의 전환이 예수님이 선포하신 행복이었다.

부자가 라자로처럼 변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할까? 죽은 후에 부자와 라자로 사이에 큰 구렁이 가로 놓여있어서 왕래가 불가능했다. 부자는 형제들에게라도 이 사실을 일러달라고 부탁하자 "그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고 이르신다.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로는 부족하다는 부자의 간청에, 그런 사람들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씀이 이어진다. 여기서 회개의 길이 제시된다. 모세와 예언자들에게 건네주신 말씀, 죽었다가 살아나신 예수님의 말씀, 곧 하느님의 말씀을 들어야 회개가 가능하다. 부자가 라자로가 되는 회심의 길, 재산이 아닌 하느님의 은총에 의지하는 삶으로의 변화는 말씀을 들음으로 시작된다. 자신의 계획을 내려놓고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따름이 회심이다. 말씀을 듣지 않고는 회심을 할 수 없고, 회심이 없이는 구렁텅이에 빠진 부자의 신세를 면할 길이 없다.

복음의 부자가 죽은 다음 고통받는 이유는 생전에 사기를 쳤거나 도둑질을 해서가 아니라, 가난한 라자로의 고통을 외면하였기 때문이다. 비극은 돈이 많아서가 아니라, 자신만 알고 다른 사람의 고통을 이해 못 하여 소통할 수 없을 때 벌어진다. 우리 사회가 겪는 문제의 근본이 소통이 안 되는 데에 있음을 지적하는 이들이 많다. 소통이 되지 않을 때 병이 깊어진다. 질병에는 통증이 따르는데 이를 느끼지 못하면 병이 악화된다. 나병은 자각증상이 없어 온몸으로 퍼져 손발이 문드러질 즈음에나 알게 된다. 암도 미리 알면 치유가 되지만 통증을 느끼지 못하면 온몸으로 퍼진 후에나 알게 된다. 몸의 한 부분에 문제가 생겼을 때 그 아픔을 느끼는 상태가 건강한 사람이다. 라자로의 배고픔과 추위와 서러움을 알지 못한 불통, 통증을 함께 느끼지 못한 것이 부자를 암이나 나병보다 더 심한 파멸로 이끈 병이었다. "우리는 모두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 몸은 한 지체가 아니라 많은 지체로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이고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지체입니다." (1코린 12, 12-27).

복음의 비유에 등장하는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이란 예수님을 의미한다. 남의 아픔에 눈멀고 남의 고통에 귀먹어 소통이 불가능한 사람이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 예수님을 어찌 알아 뵙겠는가? 자기 만을 위해 재물이나 재능을 쓰려는 태도가 곧 구렁을 파는 짓이고, 그 결과 소통하지 못하는 사람은 자기가 판 구렁 속에 갇혀 예수님도 모르고 라자로도 알아보지 못하는 상태, 곧 모든 관계가 단절된다. 죽음 이후 후회하지만 때는 늦었다. 살아서 하지 못하는 소통은 죽어서도 불가능하다. 듣고 나누는 일은 지금 여기서 해야 할 일이다. 예수님의 오늘 경고 말씀은 물질적 부자뿐 아니라, 구렁을 파 놓고 거기 숨어 이제 되었다고 안심하며 자신만을 생각하는 이들, 남과 소통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도 해당된다.

이제 라자로에게로 시선을 돌려보자. 복음에서 부자는 그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가난한 사람에게만 "라자로"란 이름을 주신다. 흔히 세상에서는 부자나 유명한 사람 이름이 자주 들먹여지고 보잘것없는 이들은 익명으로 대하는 것과는 반대다. "라자로"란 단어는 "하느님께서 도와주신다"는 뜻이다. 부자는 이름 없는 채로 두시고, 남의 집 대문 밖에서 웅크리고 사는 사람, 남의 밥상에서 떨어진 부스러기로 배를 채우는 사람, 알아주는 이 없이 동네 개들만 모여오는 종기투성이의 존재, 한마디로 사람 취급 못 받는 이 사람에게 예수께서 "라자로" 곧, "하느님께서 도와주신다"는 이름을 주신다. 엄청난 역설이다.

우리는 누구일까? 부자나 라자로 둘 다 모두 우리 모습이다. 우리는 때때로 부자가, 때때로 라자로가 되기도 한다. 어떤 때는 혼자만을 위해 구렁을 파고 숨으려는 부자이고, 어떤 때는 힘들어 오갈 데 없고, 갑갑하여 하소연할 곳 없는 라자로다. 재물이든 시간이든 여유가 있을 때는 자만하여 자신을 감추려는 큰 구렁을 파기보다 나눔과 소통으로 구렁을 메울 때다. 가난과 고통으로 삶이 너무도 힘들다면 그것은 절망의 이유가 아니라 "라자로", 곧 "하느님께서 도와주신다"는 믿음을 굳게 할 순간이다. 어떤 경우든 주님의 말씀을 듣고 회심하여 우리 눈길을 하느님께 돌릴 때 "하느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신다".


[출처] 말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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